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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Apr 11. 2022

화양연화처럼 다시 벚꽃

4월에 벚꽃을 보지 않고 지나치기는 힘들다. 도시든 산골짜기든 아니면 대학 캠퍼스나 국도변 등 어디에나 지천으로 깔려있어서다 하지만 만개한 벚꽃을 아무 때나 감상하기도 쉽지 않다. 절정의 순간이 짧기 때문이다.


시인 오세영은 ‘벚꽃’이라는 시에서 “벚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며 “종말을 거부하는 죽음의 의식(儀式), 정사(情死)의 미학”이라고 했다.

마치 굵고 짧게 사는 삶처럼 만개시기가 워낙 짧다 보니 주말에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을 찾아가면 꽃은 이미 특유의 ‘때깔’을 잃어서 실망한 적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주말이 그랬다. 대청호 주변에선 벚꽃축제가 열렸지만 극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엄두도 못냈다. 대신 숨은 벚꽃 명소인 제천 청풍호나 음성 생극 응천십리벚꽃길을 가려고 주민센터로 문의했더니 아직 꽃이 덜 피었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대전 카이스트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순간 이동한 듯 사람들의 옷차림은 벌써 초여름이었다. 넓은 캠퍼스엔 벚나무가 산재했고 나무 그늘 밑에 시민들이 돗자리나 간이의자를 앉아 소풍을 즐겼다. 하지만 그곳 벚꽃은 눈부신 자태를 잃었다. 아마도 지난 주중쯤에 만개했을 터다.



그래도 오리연못 주변에 가지가 길게 늘어져 있는 수양벚꽃은 건졌다. 분홍빛 꽃망울을 터트린 채 키가 헌칠한 긴 머리의 여인처럼 화려한 자태를 보여주는 두 그루의 수양벚꽃은 단연 '군계이학'이다.


얼핏 보면 수양매화처럼 보이는 수양벚꽃은 꽃잎이 풍성해 단 한그루라도 수백 그루나 되는 것처럼 절창의 미학을 드러낸다. 그래서 연못 다리엔 셀카를 찍기 위해 행락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린 카이스트를 나와 대청호반으로 향했다. 기왕 벚꽃의 진수를 맛보려면 벚꽃축제가 열리는 이곳이다.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장관이었지만 도로는 차들로 장사진이었다.


그 길을 간신히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시골길로 돌아 옥천 방아실로 접어들었을 때 온전히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 방아실에서 청주 문의 IC까지 25km 도로가 대청호를 끼고 벚꽃이 터널을 이룬 것이다.



이런 걸 '소확행'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 벚꽃이 절정을 이룬 때였다. 벚꽃은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눈부시게 춤사위를 추었다.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흩날리는 꽃잎도 조명처럼 환했다.


무엇보다 보은 회남과 청주 문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 염티재 아래와 꼭대기에서 보이는 벚꽃 풍광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로는 한적했으니 우리들만을 위한 벚꽃길이 된 셈이다.


그 벚꽃길을 빠져나오며 예전에 읽은 노다 유시나리의 저서 '나는 오늘도 칼퇴근'이라는  책을 떠올렸다. 벚꽃을 좋아하는 저자는 마흔 살이 되던 해, 일본벚꽃회가 추천한 장소 109군데를 모두 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일본인 평균 수명이 80세 정도이니 나에게는 40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벚꽃은 봄에만 볼 수 있다. 한 해에 한 곳씩만 다니면 총 109년이 걸린다. 절대 가능할 리가 없다. 단순 계산을 하면 한 해에 2.7개 이상의 장소를 돌아다녀야 한다. 내 계획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책엔 이나식품공업의 쓰카코시 히로시 회장의 얘기한 내용도 담겼다, 그는 “인생에도 기한이 있지요. 그 점을 항상 의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살아가는 자세부터 다릅니다.”라고 했다. 쓰카코시 회장이 벽에 붙여둔 달력에는 100년의 시간이 표시돼 있다고 한다.


노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처럼 벚꽃의 절정은 짧고 인생도 유한하다. 그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고 삶을 대한다면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무척 공감되는 말이지만 난 다른 각도에서 벚꽃을 보며 삶을 성찰한다. 화려한 벚꽃이 봄비와 바람에 흩날려 어느새 사라진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또다시 싱싱하고 화사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디 벚꽃뿐일까.


그때쯤 우리는 또다시 방아실을 찾아올 것이다. 겨우내 인고를 겪어낸 벚꽃이 절정의 미모를 뽐내는 4월의 그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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