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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an 03. 2023

그 겨울 은빛 자작나무숲에서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

함박눈이 내리거나 눈보라가 치면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겨울의 정취를 느낀다는 사람도 있지만 출퇴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빙판길에서 아찔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어 눈 길 운전은 여전히 겁이 나지만 그래도 거실 창문을 통해 눈발이 춤추듯 흩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좋다.

겨울에 눈이 없다면 소나기가 없는 여름처럼 단조롭고 밋밋하다. 겨울은 계절에 걸맞은 풍경을 연출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엄동설한에도 일부러 깊고 높은 산을 찾는다.

겨울산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해도 살을 에이는 추위를 감당하긴 힘들지만 설경과 눈꽃에 도취되면 겨울산이 그리워진다. 겨울산 중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자작나무 숲이다. 


강원도 인제와 경북 영양의 자작나무 숲은 사계절 언제 가도 좋지만 눈 속에 푹 파묻힌 겨울은 황홀한 풍광에 저절로 동심(童心)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자작나무는 이국적인 나무다. 백야처럼 뽀얀 속살이 겉으로 드러난 느낌 때문일까. 그 나무를 보면 왠지 핀란드와 스웨덴 같은 북유럽이나 러시아의 겨울이 연상된다. 러시아 혁명기 지바고(오마 샤리프)와 라라(줄리 크리스티)의 애절한 사랑을 그렸던 영화 '닥터 지바고'엔 자작나무 숲이 인상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 ‘차이코프스키’에서도 눈 덮인 자작나무 숲으로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 묘소 주변에도 자작나무가 지키고 있다. 은빛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길을 걷다 보면 세상의 시름이 잊히고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의외로 자작나무는 한국인이 정서가 깊이 스며든 향토색 짙은 나무이기도 하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1912~1995)은 20대 중반 때 함경남도 함주에서 쓴 '백화'(흰 자작나무)란 시에서 온 산골짜기에 지천으로 뿌리내린 자작나무를 노래했다.

북녘 함주에서 자작나무는 우리나라 숲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만큼이나 흔한 나무다. 



은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숲은 금방 눈에 띈다. 북위 45도 이상에서만 자란다는 말이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가을 단풍이 한창 화려한 때깔을 드러낼 때 전북 남원 지리산 피아골 트레킹에 나섰다. 


세차게 내리는 찬 가을비를 맞으며 좁다란 계곡 바윗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계곡 넘어 멀리 좌측 산기슭에 자작나무 숲이 마치 하트 모양으로 둥그렇게 모여있는 모습에 눈에 띄었다. 보긴 드문 광경이었다.


그래도 자작나무를 제대로 보려면 강원도 인제 원대리나 경북 영양 죽파리로 가야 한다. 숲 속에 눈이 쌓여 있는 겨울이면 더 좋다. 그중에서도 자작나무 숲의 원조인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겨울의 낭만이 가득한 곳이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산림감시초소 주차장에서 내려 임도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부드러운 길이라 힘들지도 않다. 처음 가는 사람은 잘못 온 게 아닌지 헷갈릴 수가 있다. 큰길에선 자작나무 숲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탐방안내소에서 눈 길이 미끄러운 산허리를 몇 구비 돌아 3.5km의 임도를 걷다 보면 어느새 남서쪽 방향의 구릉지에 자작나무 숲이 갑작스레 눈앞에 펼쳐진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람이 불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기 때문인데 발밑에선 뽀도득 뽀도득 눈 밟는 소리가 난다.


자작나무 숲은 그저 바라만 봐도 눈이 즐겁다. 미끈하게 20m 이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몸매. 그리고 곱고 하얀 피부. 그 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으니 풍경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괜히 '숲의 귀족'이 아니다. 그 전날 충청 이남지방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렸지만 강원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작나무 숲에는 유독 눈이 쌓여있었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 숲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성탄절 시즌이라 그런지 빨강 코를 가진 루돌프 사슴이 끄는 마차를 탄 산타클로스가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원대봉 깊숙히 자리잡은 숲은 의외로 넓다. 서울 여의도공원 두 배 넓이인 138ha에 달한다. 1990년 초반부터 조림되기 시작했으니 이제 수령이 서른에 육박한다. 자작나무 숲을 헤매다 보면 영화 속 '겨울 왕국'의 설경에 뇌리에 스친다. 전혀 다른 세계에 와있으니 일상의 잡념이 스며들 틈이 없다. 



시각적으로 은빛 피부를 가진 키 큰 나무가 파란 하늘 아래 빽빽이 서있는 풍경이 보여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눈 속에선 케미가 잘 맞는 나무다. 자연스레 스마트폰에 손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각도로 찍어도 작품 사진이 나온다.


자작나무 숲을 정신없이 걷다가 숲을 벗어나면 바로 임도가 등장한다. 가는 길이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산림 초소에서 자작나무 숲까지 왕복 8km. 길지 않지만 자작나무 숲에 얼마나 머무느냐에 따라 소요시간은 길어질 수 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는 자작나무의 상징어다. 눈이 오는 어느 겨울날, 자작나무 숲길을 찾으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눈만 내리면 자작나무 숲이 어른 거렸다. 먼 길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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