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니 살이 찌려고 흰쌀밥에 겉절이가 생각나 배추를 사러 로컬푸드에 들렀다. 생각대로 마트보다 저렴하고 신선한 야채들이 제각각 얼굴들을 내밀고 있었다. 우선 배추 두 포기를 사고, 쪽파와 부추도 한 단씩 샀다. 여름 배추는 단맛이 덜해 양념에 갈아 넣을 배도 동그랗고 잘생긴 것으로 한 개 사고, 배추에 고운 옷을 입히기 위해 홍고추도 두 봉지 샀다.
겉절이에 필요한 재료들을 카트에 담고, 저녁에 먹을 다른 야채들을 둘러보다가 진열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늙은 호박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일거리가 늘어날 것이 뻔해 눈을 피했다. 옆을 지나 생선코너에 가는데도 자꾸만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져 뒤돌아 보니 역시나, 다시 눈이 마주쳤다.
어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얼른 한 마리에, 만 원 하는 갈치와 삼치를 사들고 지나치려는데, 이번엔 늙은 호박이 나를 향해 방끗 웃는다.
웃는 얼굴을 못 본척할 수도 없고 어쩌지 그냥 지나쳐 버릴까?
순간 고민하는 내 마음을 알기나 한 듯 호박이 큰소리로
"여기예요! 그쪽 말고 나를 봐야지요. 이리로 와 보세요."
내게는 어찌나 큰 목소리로 들리던지 다른 곳에 가려던 시선을 거두고 그 늙은 호박 쪽을 바라봤다.
늙은 호박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이끌려 늙은 호박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부르셨나요?"
"네, 당신 맞아요. 우리 조금 전 눈이 마주쳤잖아요. 그렇죠!"
"그렇긴 한데, 저는 당신을 사갈 생각이 없어요!"라고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늙은 호박이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니잖아요. 처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눈빛은 분명히 나를 원하는 눈빛이었다고요. 그렇죠! 그러니 나를 데려가 줘요. 분명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보세요 이 중에서 내가 제일 크면서 속도 꽉 차고 빛깔도 예쁘잖아요."
호박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나는 항산화 성분인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해서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며 면역력을 높여주고, 섬유질이 많아 소화도 잘 될뿐더러 포만감이 높아 다이어트에도 좋답니다. 또 이뇨작용이 뛰어나 각종 노폐물의 배출에 도움이 되어 회복 중인 환자나 산모에게 더욱 좋습니다."
늙은 호박은 숨이 찬 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나는 쓰임새도 많아요. 요리를 해도 되지만 바람이 잘 부는 곳에 놓아두면 잘 상하지도 않고 장식용으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옛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호박고지를 넣은 달달한 시루떡에 대한 당신만의 추억도 알고 있습니다."
잊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늦가을 담이나 볏단 위에서 푸르던 잎이 말라가고 노란 호박만 남게 되면 어머니는 호박을 집안 서늘한 마루 한편에 쌓아두셨다. 볕이 좋은 날 껍질을 까고 속을 파내서 노란 살은 길게 잘라 빨랫줄에 걸어 말리시고, 파낸 속에서 호박씨를 모아 말려두었다가 겨울에 간식으로 주셨다. 깐 호박씨를 받아먹으려고 기다기며 재촉했던 일도 생각이 났다.
빨랫줄에서 꼬들꼬들 말린 호박고지는 가을추수가 끝나고 시루떡을 할 때 넣어 주신곤 했다. 색도 곱고 달달한 맛이 좋아 호박고지만 빼먹었던 기억도 났다. 늙은 호박 덕분에 잊고 지냈던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마음 한 구석이 따스해져 왔다.
호박의 말에 이끌려 손을 뻗어 번쩍 들어 올렸다. 무직한 것이 속이 꽉 차 보였다. 햇볕을 골고루 받아서 노랗게 잘 익었고 둥글면서 납작하고 단단한 것이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이미 짐작한 대로였다.
어떻게 이런 호박을 외면할 수 있을까?
차에 싣고 오는 내내 신이 났다.
저 호박을 어떻게 할까? 호박 속은 씨로 꽉 차 있겠지!
속을 파내고 호박씨는 까먹을까?
어머니처럼 호박씨를 딸에게 까주면 좋아할까?
호박고지를 만들어 백설기에 넣어 먹을까?
호박죽도 쑤어 먹고 잘게 썰어서 호박전도 부쳐먹을까?
또 뭘 해 먹을까? 언니와도 어머니의 추억을 나누어야겠다.
겉절이를 하려고 산 배추와 재료들은 잊어버린 채 호박에만 정신이 팔렸지만 집에 오는 내내 설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