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 육지는 월동준비를 하지만, 우리 집은 12월이 되면서 월동준비를 시작한다. 제주로 이주하고 따뜻한 날씨 덕에 겨울 맞을 준비가 늦어지는 이유다. 김장도 해야 하고 유자청도 담가야 하고 사과도 사서 몇 알씩 소포장해 저장도 해야 한다.
12월 첫째 주 월동준비로 우선 유자청을 담기로 했다. 유자를 딴다고 장바구니를 챙겨 카트까지 끌면서 남편이 집을 나섰다. 뭘 그리 많이 따오려고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동네 산책을 하다가 하천변에 유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본 후로 따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유자를 봤을 때 야생귤인가 싶었는데 향이 진한 것이 귤이 아니고 유자였다. 야생으로 자라서 어찌나 향이 진한지 만지기만 해도 종일 냄새가 난다.
산책길 한참 아래에 있는 하천 비탈에 자라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 우리뿐 아니라 이곳을 오가는 동네 주민들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에게 발견되어 매년 유자청을 담가 겨우내 먹게 되었다.
가파른 비탈에 나무가 자라고 있어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고 가시 때문에 따기도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12월 중순이 지나 유자가 나무에서 숙성되었을 때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어 유자를 딴다. 질긴 줄기도 유자가 숙성되면 흔들기만 해도 꼭지가 떨어지니 줍기만 하면 된다.
유난히 올겨울은 날씨도 따뜻하고 다음 주에는 김장을 담그리고 해서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부득이 이번 주에 유자청을 담기로 했다.
코끝에 알싸한 바람을 맞으며 카트를 끌고 걸었다.
얼마큼 유자를 따 올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노란 꽃이 눈에 띈다. 헉 개나리가 피었다. 여린 잎은 추위에 움츠려 있지만 분명 개나리다. 지구온난화로 기후가 변하고 있다지만 자꾸 자연을 거스르는 일들이 일어나니 이러다가 자연의 역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된다.
갈림길을 지나 오르막길로 들어서니 바람에 유자향이 묻어난다. 가까워질수록 향은 더 짙어지고 덩달아 발걸음도 빨라진다.
여름엔 초록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유자가 노랗게 익으니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가파른 비탈길에 유자나무가 있어 위험하다고 남편이 내려가며 산책로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낙엽이 겹겹이 쌓여 발을 잘 못 디디면 푹 꺼질 것 같고 나무와 덩굴줄기들이 엉겨 있어서 내려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조심하라고 남편에게 일러두고 산책로에서 기다렸다.
남편은 아래로 내려가 적당한 유자나무를 찾아 가지를 흔들어 유자가 떨어지기를 바랐다. 아직 줄기가 단단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남편은 한참을 유자나무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어떤 도구도 없이 담아 갈 장바구니만 챙겨 왔으니 흔들어서 떨어지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가시가 단단하고 길어 자칫하면 찔리기 십상이다.
위에서 마냥 기다리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하다. 남편에게 몇 개나 땄는지 물었더니 일곱 개라고 한다. 육지에 있는 딸에게 주려고 욕심을 부렸다가 나무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그만 따고 올라오라고 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우리 세 식구 먹을 만큼은 됐다.
커다란 장바구니를 챙긴 남편은 옆집 형님에게도 육지에 있는 큰딸에게도 사무실에도 나눠주고 싶었겠지만, 올해는 유자 일곱 알로 만족해야 했다. 공연히 욕심을 부리다 다치기라도 하면 낭패다.
돌아오면서 갑자기 나무에 오르느라 힘을 줘서 여기저기 아프다는 남편이 내년에는 그냥 담가져 있는 유자청을 사 먹자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년에는 누구랑 유자를 따러 오나?'
집에 와서 보니 유자 일곱 개 중에 그마저도 두 개는 상했고 다섯 개만 멀쩡했다. 유자를 식초와 베이킹소다로 깨끗이 씻어 뜨거운 물에 한 번씩 데쳐냈다.
유자에 물기가 마르는 동안 닦아 놓은 병을 끓는 물에 열탕소독을 했다.
유자는 반으로 잘라 겉껍질과 속을 따로 분리했다. 껍질은 얇게 채를 썰고 알맹이는 씨를 빼고 모아서 가위로 잘게 잘라 주었다. 비닐봉지에 채를 썬 껍질과 잘라진 알맹이를 넣고 같은 무게만큼 설탕을 넣어 버무렸다. 그리고 열탕소독한 병에 꾹꾹 눌러 담고 위에 설탕을 뿌려 공기를 차단해 주었다. 양은 얼마 안 돼 아쉽지만 담가 놓은 유자청을 보니 그래도 흐뭇하다.
뚜껑을 닫고 상온에 2~3일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어 일주일쯤 숙성시키면 맛난 유자청이 된다. 뒷정리를 하고 손을 씻었는데도 유자향이 진하다. 자연 그대로 자라서 사람이 키운 유자보다 못생기고 겉은 거뭇거뭇하지만, 향은 정말 진하다. 유자청을 담그느라고 손이며 도마며 집안에 온통 유자향이 베었다.
눈이 오고 따뜻한 차가 생각날 때 달고 쌉싸름한 유자차를 끓여 함께 나눌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와 나누면 좋을까?
진한 유자향을 누가 좋아했었지?
올해는 얼마 안 되지만 좋은 사람들과 나눌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넌 언제 익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