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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복 Aug 26. 2023

쉿, 왔다

가을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왔다고도 하고

물안개 뒤 깊은 물에서 튀어나오는 걸 본 이가 있다고도 했다

혹은 들판 곳곳에 이슬보다 가볍게 뛰어내렸다는 말도 있다

한 둘이 아니고 한 부대가 새벽에 마을을 지나갔다고

콜록거리는 노인이 말한다


박주가리 꽃향기가 갑자기 짙어졌다

비 그치자 몰려나온 벌들의 날개짓이 바빠졌다

뭘 숨기려는지 입을 꼭 다문 감들의 볼이 빵빵하다

뒤돌아서 소란스럽던 풀들이 딱 멈추고 딴청 부리는 사이

개 한 마리 먼 들판을 향해 짖기 시작한다


한 둘이 아닐 텐데 어디에 숨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갯벌 앞 갈대밭에서 사살됐다는

무장공비보다 더 은밀하다

밀잠자리 사방에 띄워 찾아보라 했는데

허탕만 치고 곤두박질한다


낙하산 부대처럼 점점이 몰려오는 구름 사이로

한낮의 땡볕이 살짝 기울자

사사삭, 뒤쪽의 풀숲을 낮게 기는 소리 들린다

왔구나, 가을




길고

무덥고

무섭고

무거웠다


그러나

이젠 디졌다 너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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