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있다
나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공허하고 두렵고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 있을까?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넷플릭스에 떠서,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이 주인공이라서. 살펴보니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한듯 하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평균 서너편의 영화를 계속 찍은걸 보면 영화에 대한 남다른 재능과 열정이 있어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블란쳇을 <반지의 제왕>에서 처음 만났다. 수백 년을 살며 지혜와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엘프계의 여왕으로 영원한 기품과 아름다움의 갈라드리엘의 매력은 이 영화에 열광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돈 룩 업>에서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륜녀이자 일반 사람들의 정서적 공감대가 없는 캐릭터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케이트 블란쳇의 하드 캐리로 구성된 영화다. 그만큼 케이트의 연기에 호감을 느낀다면 영화에 푹 빠져들 수 있다. 온갖 자극적이고, 피가 넘치는 하드코어가 난무하는 넷플릭스에서 간만에 잔잔하며, 따뜻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버나뎃은 천재 건축가로 미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최연소 '맥아더상'을 수상하고, 주변의 여러 건축계의 전문가들마저 독보적이라 평가했던 그리고 여성이기에 더욱 그 상징성이 돋보였던 건축가였다. 어느날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잘나가는 훈남 남편과 결혼하며 행복한 가정생활 이면에, 생명줄을 힘겹게 붙잡은 딸아이를 온전히 키워내기 위해 아줌마가 되기로 선택하여 시애틀의 조용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줄거리 소개로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딸의 소원으로 가족끼리 남극 여행을 어쩔 수 없이 약속한 버나뎃은 불만을 죄다 인도의 온라인 가정부 '만줄라'에게 털어놓으며 물건 구매를 시킨다. 온갖 가지 불만사항을 온라인으로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불만을 쏟아내는 버나뎃의 표면적인 환경은 매우 훌륭해보인다. 커다란 저택에 건축가로서 버나뎃의 손길이 가득 담긴 집 곳곳의 모습들, 남편은 여전히 잘생겼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연계한 기술회사의 대표로 있으며, 딸은 똑부러지고 공부도 말도 잘하는 모범생.
남극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멀미약을 받으러 갔다가 약을 잘못 먹고 약국 소파에서 퍼질러 자는 것을 목격한 남편과 회사 직원. 그냥 잠에 든 것 뿐인데 이미 그 때부터 주변의 시선은 그녀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버나뎃의 일상은 이제 악몽이 된다. 버나뎃이 이용한 온라인 가정부 만줄라는 러시아 마약조직이어서 그녀가 털어놓은 온갖가지 이야기 속에서 개인정보가 줄줄 새나간 상황. FBI가 찾아와 심각한 범죄 이야기를 하고, 놀란 남편은 아내를 문제있는 대상으로 보며 남편은 소개받은 상담사를 통해 아내는 정신질환이 있는 심각한 환자라고 규정하며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도록 권유한다. 버나뎃은 화장실을 통해 집을 탈출하여 공교롭게도 앙숙이었던 옆집 이웃의 도움을 통해 혼자 남극으로 여행을 떠난다. 자신이 가기 싫었던 남극에서 버나뎃은 자신이 건축가로서 꿈꾸었던 능력과 열정을 한 껏 펼칠 수 있는 기회와 마주한다.
남극의 건축을 담당하는 책임자는 버나뎃에게 경고한다.
"월동 때 어떤지 알아요? 상상 이상으로 힘들어요. 반사회적인 성향이 있어야 하죠.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며 오랫동안 운동도 못해요. 샤워도 아주 가끔 하구요. 일단 남극점에 가면 5주간 머물러야해요. 떠나고 싶어도 못 가요."
버나뎃은 이 일을 위해 20년간 훈련해온 것 같다며 아주 해맑게 답한다. 세상의 끝에서 그녀에게 가장 완벽한 일이 등장한 설레임이다.
자발적 아싸의 고통스런 일상
버나뎃은 평범한 사람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딸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엄마들과도 엥간하면 알고지내며 친해질만 한데, 뛰어오는 이웃 아줌마를 외면하고 말 많은 아줌마와 이야기가 하기 싫다고 딸한테 말하며 자동차의 악셀을 밟는 장면은 참 '애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철딱서니 없단 소리 들을만 하다. 또 다른 이웃 아줌마는 남편 직장에서 상사로서의 존경 이상의 모호한 눈빛으로 남편을 쳐다보며 버나뎃의 뒷담화를 해댄다. 이웃집까지 넘어가는 나무덩굴을 정리한답시고 그대로 뒀다가 비오는 사이에 담장이 무너져 이웃집을 초토화시키고 버나뎃이 그 이웃과 고성이 오가며 싸우게 되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되는 사회에서의 트러블'을 그대로 상징한다. 여기에서 자발적 아싸 버나뎃이 택한 것은 일탈이었다.
주인공 버나뎃. 참 아싸스런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자신에게 기대 이상으로 관심과 지나친 간섭으로까지 나타나는 이웃을 멀리하고, 버나뎃과 가장 소통이 많은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에어팟을 꽂고 하루종일 자신의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 털어놓는 대상은 음성인식 기계였다. 버나뎃이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음성을 글자로 변환해 '만줄라'라는 곳에 메일로 보내 이야기도 들어주고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주는 존재이다. 이쯤 설명하면 우리도 모르게 버나뎃은 사회성이 부족한 인간이란 인식이 절로 생긴다.
온갖가지 꼬리표로 괴롭히는 세상에서
자발적 아싸를 선택하며 이웃과, 세상과 단절을 선택한 버나뎃을 주변에서는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 버나뎃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구매해주고 배송도 해주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란 실체는 러시아 해킹 조직임이 밝혀져 FBI가 집을 찾아온다. 동시에 버나뎃의 아싸기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남편은 뒷담화해대는 이웃이나 직장 부하의 말을 듣고 심리학 상담사를 집으로 데려온다. 어느샌가 버나뎃은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영혼에서 우울증, 적응장애, 사회부적응, 잠재적 테러리즘 혹은 국제범죄 개입이라는 엄청난 낙인이 찍혀지게 된다.
버나뎃을 둘러싼 세계는 이제 철저히 족쇄와 꼬리표로 그녀를 옥죄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면 은근히 사건이 벌어지고 그러한 낙인이 버나뎃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구조적인 특성인 것으로 설명되는 듯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꼬리표로 규정당하고 있는지를 새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MBTI를 과학으로, 절대적 인간의 기준으로 삼아 사람을 사귀는 인간관계의 척도가 되는 요즘이 너무나 황당하고 무섭다. 이런 말 마저도 쟤는 INTJ라서 저래 따위의 말로 또 다시 사람을 규정하겠지만.)
버나뎃은 이 때부터 모든 행동이 즉흥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에서, 남들이 규정하는 나를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무책임하게 도망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사회부적응자 아싸에 경력단절녀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보였다.
그녀를 받아준 단 한 곳은 지구 끝, 세상 끝 남극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기보다 혼자서 묵묵하게 때로는 고독하게 일해야 하는 그 곳이
버나뎃이 재능을 발휘하고, 그녀가 그녀로서 숨쉬고 온전케하는 가장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사회적 통념에서 어긋난, 괴짜만 살아남을 듯한 그곳이 버나뎃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아싸에게 보내는 희망의 응원
버나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삐뚤어지고 부적응의 어긋난 사람이지만, 그녀는 삶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보통 사람이면 집안 바닥을 기어들어온 넝쿨을 제거했겠지만, 버나뎃은 카펫을 칼로 구멍을 내서라도 그 넝쿨이 자라도록 둔다. 하찮은 넝쿨이라도 그것이 집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각에서 파괴와 제거의 대상이 아닌 넝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준 것은 아닐까. 그러한 태도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버나뎃의 딸이다. 똑부러지게 생긴 딸은 버나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친구이다. (왜 딸을 갖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 딸은 어긋날수도 있는 버나뎃과 남편의 관계를 화해하고 이해하게 하는 굳건한 다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버나뎃의 일탈을 밀어준건 그녀의 앙숙이었던 이웃집 아줌마였다. 이 영화는 선악구분이 아닌 인간이 그 자체로서 모두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확신시켜주고 싶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를 좋아하지도, 경험도 별로 없어 두려움이 큰 사람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아싸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나를 나로서 보기보다는 엄마, 아줌마, 누구 아들, 어느 회사 대리, 아저씨 따위로 규정 받는 세상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이 영화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1. 나 같은 모난 사람을 받아줄 곳은 지구 어딘가에 있다 (그것이 남극일지라도)
2. 아이를 키우는 등 현실에서 어쩔 수없이 선택한 삶은 중간 과정일 뿐 나를 이루는 과정은 그 이후에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어떤 리뷰에서는 버나뎃이 워낙 능력좋은 캐릭이기 때문에 일탈도 가능한 거라고 주장한다. 어느정도 사실이라 생각하지만, 천재만 일탈이 가능하진 않다. 영화에서 여전히 딸은 학교를 다녀야 하고, 직장 잘다니던 남편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때려쳐 백수가 된 상황으로 이 가족의 삶이 앞으로도 탄탄하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3. 버나뎃 같은 훌륭한 건축가도 아니었던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평소에 배워보고 싶었던 것을 시도해보라고 하고 싶다. 배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고, 조금 더 적극적이라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학원을 다니든, 사이버대학을 다니든 방법은 많다. (내가 영어를 가르쳐 본 사람들 중 가장 동기부여가 강했던 사람은 70세의 할머니였다. 그 분은 손녀와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알파벳만 겨우 쓸 줄 알다가 8개월 만에 기본 회화와 읽기, 쓰기가 가능해졌던 것을 보며, 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나 자신이 될 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4. 버나뎃이 다시 건축가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서 가족의 응원이 필요했다. 우리 현실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로 주변 사람들이 나의 길을 절대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며, 그런 고민과 현실의 장벽 때문에 망설여지는 사람들에게 꼭 도전해보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