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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May 19. 2024

해내야 하는 것들에 매몰되지 않기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퇴직하고 수도권으로 잠시 올라와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지방에서와는 달리 얻게 되는 정보도 많고 만나지는 사람들의 경력들도 달라서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택한 길로 계속 일을 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아동, 청소년, 청년, 그리고 그들의 부모까지 여러 그룹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요 몇 년 사이는 청년층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들은 달랐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곤 했다. 자신들이 지각하는 압력이 만만치 않고 그에 비해 자신의 능력은 아주 낮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신념처럼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잘 자라서 사람들을 돕고 세상에 빛이 되는 인재로 성장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 없다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저 신념이 너무 강하게 새겨져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난 존재가치가 없어.'라고 내면 깊숙이 자리 잡게 되는 경우다.


'누가 그렇게까지 생각할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가 그리고 국가가 '인재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어 '더 나은 성과', '더 나은 능력'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때만 인정받고, 관심받고, 칭찬받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언가를 하다가 실패했을 때, 비난과 타박, 조소와 경멸이 아니라 위로와 지지를 받아본 경험은 얼마나 있는가?


비난과 경멸은 우리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고통스럽기에 실패하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 집중하게 되고 혹시나 이번에도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은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과민해지는 신경을 견디기 힘들고 우리의 생존본능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여 회피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이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는 법을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 실패에 대해 보다 관대해지고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해 주고 원한다면 함께 도울방법을 찾아준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들이 자리 잡게 될까? 더 나아가도 괜찮고 여기서 멈춰도 괜찮다고 진정으로 행복과 안녕을 바랄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그럼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한다.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다. 무언가를 잘해서, 머리가 좋아서, 결과를 잘 만들어내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인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나의 욕심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것 그것만 가능해져도 우리의 삶은 훨씬 생기 있고 다채로워지리라 생각된다.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릴 때 숨이 막히고 두렵고 막막하다면 지쳤다는 신호일 것이다. 과거의 실패 경험에 휩싸여 자신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주변의 압력이 지나치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이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면 안 되는 것일까? 계속 달려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고 어느 순간에 쉴지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잘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휴식을 주위에서 용인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통화의 말미에 이렇게 이야기를 전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많이 지치신 것 같다고 그러니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지금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쉬어보자고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해 보라고. 그랬더니 웃으면서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보겠다고 답했다. 쉽지 않을 텐데 노력해 보겠다는 말이 고마웠다.


한국인의 특성을 연구하신 모 대학의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완벽주의자라고 한다. 그 많은  완벽주의자들이 '완벽'을 상황에 따라 조절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태어나고 완벽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지 완벽함을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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