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눈
버들평원 늑대무리의 우두머리는 검은 눈이었다.
먹이가 어디에 있을지 찾아내고
어떻게 접근해서 사냥을 하면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감이 좋아 위험도 잘 피했고 사냥꾼들이 다니는 길목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버들평원 늑대들은 다치는 일도,
배를 곯는 일도 적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 검은 눈을 우러러보았고
언제나 자신들을 잘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검은 눈에게 자식이 둘 있었다.
첫째인 회색눈은 날래고 눈치도 빠르고 용맹해서 다음 후계자가 되리라 기대를 받고 있었다.
둘째인 둥근 귀는 순한 성격에 우직해서 형을 잘 따랐다. 검은 눈은 회색 눈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랐다.
아직 어린 회색 눈을 사냥에 데리고 나갔고
그때마다 회색 눈이 더 잘 해낼 수 있도록 밀어붙였다.
회색 눈은 때로는 겁이 나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기대하고 있는 아버지 검은 눈을 실망시키는 것이 더 두려웠기에 온 힘을 다해 덤벼들었고 검은 눈이 시키는 것은 다 해내었다.
검은 눈은 회색 눈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내야 한다고 믿었기에 늘 목표치를 올리고 해내도록 압박했다. 그것이 회색 눈을 위한 길이라 믿었다.
둥근 귀는 자신이 형만큼 뛰어난 늑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형을 이겨야겠다거나 아버지 눈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형이 아니니까.
둥근 귀는 무리에서 아버지나 형처럼 존경과 기대를 받지는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고 또래 늑대들과 장난도 치고 근처 수풀 속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혼나는 일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둥근 귀에게 세상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곳이었다.
가끔은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형이 부럽기도 했지만 돌아올 때마다 몸에 상처가 늘어나는 형을 보면 그런 생각도 옅어졌다.
형처럼 훈련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해낼 자신도 없었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눈부시고 동무들은 재밌고 놀이는 즐거웠다. 어른들처럼 큰 사냥감을 잡지는 못해도 때때로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먹기도 하니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검은 눈은 회색 눈에게 기대가 컸다. 둘째인 둥근 귀는 영리하지도 재빠르지도 않아서 후계자로 내세우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첫째인 회색 눈은 사냥에 재능이 있었다. 감도 좋았고 무리를 이끌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시키는 것을 기어코 해내는 모습에서 의지가 보였고 그만큼 믿음직했다.
몇 해전 사냥꾼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자신의 반려
빛나는 눈은 첫째도 둘째도 자유롭게 키워달라고 했었지만 지금의 결과를 보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지않아 회색눈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우두머리가 될 터였다.
그러면 두 번 다시 가족을 잃는 일 따위 회색 눈은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회색 눈은 점점 검은 눈의 요구가 버거웠다.
매번 죽을힘을 다해 해내는데 잘했다고 인정은 해주지만 다음에는 더 어려운 일을 해내야만 했다. 처음에는 자신만 사냥에 데려가는 것이 자신을 더 믿는 것이라 생각해서 기뻤었다. 아버지의 격려로 힘든 사냥을 성공시켰을 때는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해칠 수 없게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회색 눈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회색 눈은 성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리의 모두가 회색 눈이 믿음직스럽다고 했다. 신중하고 재빠르며 용기 있는 늑대라고 칭찬했다.
회색 눈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무사히 사냥에 성공했을 때도, 검은 눈이 인정을 해주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때때로 멍하니 앉아있곤 했는데 눈매가 매섭다 보니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리의 누구도 회색눈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따금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실컷 달리고 나면 괜찮아지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역할은 훌륭히 해내고 있기에 그것으로 괜찮았다.
둥근 귀는 형인 회색 눈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회색 눈은 필요할 때 말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마저도 간단한 몸짓으로 대신했다. 무리 속에 있기보다 혼자 떨어져 앉아있었고 다른 이들은 무리를 위해 늘 경계를 선다고 칭찬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색 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으니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색 눈은 늘 완벽했으니까.
이른 봄 회색 눈은 혼자 정찰을 나왔다가 곰을 만났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앞발에 그만 큰 나무가시가 박혀버리고 말았다. 걸을수록 점점 더 깊이 찔러오는 가시 때문에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어서 무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걷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회색 눈은 주위 경계가 가능한 장소를 찾아 잠시 쉬기로 했다. 가시를 빼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로가 몰려왔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신의 피냄새를 맡고 맹수가 찾아온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우는 나무를 한 짐 해다가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냥꾼들이나 다니는 험한 길이라 다른 사람들은 잘 오지 않는 곳이었는데 산에서 나고 자란 바우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도 했지만 바우는 산이 좋았다.
곧 해도 질 것 같아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어디선가 낑낑 거리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곤란에 빠진듯한 소리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보니 늑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직 성체는 아니지만 탄탄해 보이는 근육이 제법 야무져 보였다. 녀석은 꽤나 아픈지 자신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이쪽을 보지 않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바우는 지게를 내려놓고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녀석은 그제야 저를 보더니 짧게 으르렁 거리고는 그것도 그만둬버렸다. 마치 자신을 어찌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바우는 녀석의 태도가 묘하다 싶었지만 아파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는 다가가 상처를 살펴보았다.
앞발에 제법 큰 나무가시가 박혀 있었고 조금씩 피가 배여 나오고 있었다. 우선 가시를 뽑고 지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지난번 다친 이후로 갑오징어 뼈만큼은 들고 다니고 있으니 지혈은 쉬이 할 수 있을 터였다.
녀석의 무심한 태도를 보고는 용기가 났다.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를 치료할 것이다 하고 말한 뒤 앞발을 들어가 시를 뽑아내었다. 녀석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공격할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피가 흘러나오고 있어서 얼른 갑오징어 뼈를 갈아서 피를 막고 옷을 찢어서 상처부위를 둘둘 말았다.
바우는 잠시 생각했다. 맹수이긴 하나 아프고 움직이기도 어렵다. 이대로 두고 가도 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게에 나무를 다 내리고 녀석을 올렸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회색 눈은 점점 아파오는 앞발 때문에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어떻게든 무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움직이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 편안해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나타났을 때도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버지 검은 눈은 늘 인간은 적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약해진 지금 적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은 가시를 뽑고 상처를 치료하고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걸까?'
뭐가 됐든 의미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우는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늑대를 내려놓았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다른 맹수들에게서 지킬 수는 있겠지.
늑대의 입에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주고는 자신도 끼니를 챙겼다. 한숨 자고 내일이 되면 저 녀석이 기운을 차릴 테고 그럼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바우는 한 번 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회색 눈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퍽 좋았다. 편안하고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흐릿한 기억 속의 엄마품 같았다. 검은 눈은 늘 인간이 나쁘다고 했는데 저 인간은 자신을 돕고 있었다. 아버지가 틀렸다!
회색 눈은 이틀을 더 바우와 있었다. 바우는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뭘 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와서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고는 물을 챙겨주었다. 한 번은 어디서 꿩을 잡아와서 자기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곳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는 경계밖이고 무리가 자신을 찾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처를 감싼 천을 풀었던 날 회색눈은 떠나기로 했다.
바우는 언제나처럼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 나무도 나무지만 질 좋은 버섯들이 있어서 캐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깜깜해지면 여러모로 성가신 일들이 생길 수 있었다. 서둘러 마무리하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 들어서자 예전에 만났던 그 늑대가 생각났다. 이쯤 어딘가에 그 녀석이 꼼짝 못 하고 누워있었었다. 그날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녀석도 이상하리만치 순했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갑자기 숲이 조용해졌다. 생각에 빠져 있던 바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한 느낌이 몰려왔다.
수풀 속에서 늑대가 나타났다. 덩치도 크고 눈빛도 매서웠다. 세 마리가 더 나타나 바우를 에워쌌다.
이쪽으로 늑대가 온 적은 없었다.
바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지팡이를 꼭 쥐었다. 맞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처음 나타났던 녀석이 신호를 보냈고 다른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지팡이로 달려드는 늑대를 후려치고 버텼다. 늑대들은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처음 나타났던 늑대가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또 다른 늑대가 나타나더니 바우 앞을 가로막고 섰다. 늑대들은 새로 나타난 늑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늑대도 으르렁거렸다. 단단히 힘주고 서있는 모습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회색 눈은 한눈에 자신을 도와줬던 인간을 알아보았다. 경계너머까지 사냥을 나가보겠다는 검은 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그 인간을 마주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인간이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무리로 돌아왔을 때 검은 눈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돌아왔으니 됐다는 듯 전과 다름없이 무리를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
회색눈은 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멍하니 있는 일이 없어졌다. 대신 그 인간이 자주 생각났다. 한번 더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아니, 어쩌면 늘 쓰다듬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인간이 지금 자기 뒤에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검은 눈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검은 눈이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신기하게도 무리는 자신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검은 눈은 무슨 짓이냐며 비키라고 했지만
회색눈은 자신을 도와줬기 때문에 절대 비킬 수 없다고 맞섰다.
검은 눈은 회색 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을 편들다니 자신이 아끼던 반려를 죽게 만든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인간의 편을 드는 것인지.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검은 눈은 회색 눈에게 달려들었다. 아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사정을 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회색 눈은 아버지 검은 눈이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인간을 보호하러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검은 눈이 자신에게 얼마나 기대를 거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꺼이 맞서 싸웠다. 당신의 생각은 그럴지 몰라도 내 생각은 다르다고 적어도 저 인간은 나쁘지 않다고 그래서 지킬 거라고 말했다.
검은 눈은 무리에서 최강자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있었다. 회색 눈은 이제 성체가 되었고 자신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으며 자신도 인정했듯이 타고난 능력이 뛰어났다. 치열하게 공방이 오갔지만 회색 눈을 이길 수는 없었다.
회색 눈은 완벽하게 자신을 이겼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인간의 편에 서서 자신을 꺾다니!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그 잠깐사이 검은 눈은 늙어버렸다. 기대하던 아들의 배신은 너무나 아팠다. 대체 왜 이러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회색 눈은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냥 아버지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살고 싶다고 그러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검은 눈은 회색 눈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이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후계는? 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은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에 고통스러운데 회색 눈은 고요했다.
이질감이 들었다. 자신이 알던 아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수풀 속에서 둥근 귀가 나왔다. 평소 챙기지도 않았던 자신의 둘째 아들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그만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자고 무리는 앞으로 자신이 이끌겠다고 했다.
검은 눈은 처음으로 둥근 귀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몸과 안정되고 확신에 찬 눈빛이 보였다. 검은 눈은 회색 눈과 둥근 귀를 번갈아 보았다.
회색 눈과 둥근 귀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눈은 어딘가 후련하고 생기가 돌았고
둥근 귀는 굳건한 분위기를 풍겼다.
회색 눈이 천천히 둥근 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둥근 귀는 웃으면 형덕분에 하고 싶은 거 실컷 하며 살았으니 자신이 더 고맙다고 했다.
검은 눈은 무리를 이끄는 책임을 넘겨서 미안하다고 했다.
둥근 귀는 맘대로 살았는데 이제 그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어서 이참에 책임지는 삶도 살아보려고 하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형이 스스로 선택했듯 자신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회색 눈은 너라면 잘할 거라고 웃어주었다.
검은 눈은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아들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였다.
첫째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겠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믿고 보내주어야 했다.
회색 눈을 한번 더 눈에 담고 등을 돌렸다.
둥근 귀가 옆에서 따라왔다.
자신 있느냐고 물으니 둥근 귀는 웃으며 말했다.
모두 자기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자신도 사냥을 잘한다고 말이다.
회색 눈은 떠나가는 가족들을 보았다. 이제 다시는 무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택한 길이니까.
그래서 멍하니 서있는 인간에게 다가가 머리를 비볐다.
바우는 방금 본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 녀석이 자신을 구했다. 그것도 동족을 버리면서 말이다. 이렇게 큰 일을 저질러 놓고는 옆에 와서 머리를 비벼댄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이 녀석과는 떨어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려가 생겼다. 어느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귀찮게 하지도 않을 당당하고 멋진 반려다.
"고맙다"
바우는 씩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옆에서 회색 눈이 꼬리를 살랑이며 같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