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수리
수리는 지난여름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태어났어요.
한여름 장마 때 먹이가 없어
어미가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무탈하게 쑥쑥 자라서 가을이 된 지금은
제법 성체에 가까운 태가 났답니다.
나무둥치아래 은신처는 수리의 안식처이자
어미와 함께 있는 따뜻한 둥지였어요.
수리가 자라면서 활동반경도 같이 넓어졌어요.
고슴도치는 야행성이라 밤에 움직이는데
수리는 특히 밤을 더 좋아했어요.
주위가 조용해지고 먹색의 어둠이 내려앉으면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달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오묘하게 빛났어요.
개울물의 물결을 따라 달빛이 흘러내리는 것은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웠어요.
먹이를 찾다가도 그 풍경들을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날도 그런 날이었어요.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밤풍경에 취해있었지요.
분명 무슨 소리가 났을 터인데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러다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하게 느껴졌어요.
오싹한 느낌이 들었어요.
주위를 둘러보곤 서둘러 둥지로 돌아가려고 방향을 잡았어요.
그 순간 수풀을 헤치고 커다란 포식자가 수리 앞에 나타났어요. 스라소니였어요!
수리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떨리는 몸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칠 뿐이었죠.
어미는 늘 말했었어요.
큰 맹수들을 조심하라고 말이죠.
미처 피하지 못했다면 몸을 둥글게 말고 가시를 세우라고 했었어요.
그러면 성가셔서 포기할 거라고요.
수리는 어미에게 늘 들었던 대로
몸을 둥글게 말고 등가시를 바짝 세웠어요.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몸은 떨렸어요.
어미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누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알고 있었어요.
도와줄 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요.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무서웠지만
지금은 혼자서 버텨야 했답니다.
수리는 몸을 더욱 웅크렸어요.
이제 수리는 밤송이처럼 보였답니다.
스라소니는 수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요.
앞발의 발톱을 교묘히 움직여서 수리의 가시를 피해
이리저리 수리를 굴렸어요.
수리는 어지럽고 힘들어서 기절할 지경이었지요. 하지만 스라소니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었기에 수리는 더 힘껏 등가시를 세우고 앞발과 뒷발을 꽉 맞잡아 몸이 풀리지 않게 버텼어요.
이건 버텨야 사는 게임이었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어요.
이리저리 굴려지느라 정신도 없고 속도 울렁이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을 툭툭 치는 감각이 사라졌어요.
잠시동안 수리는 꼼짝 않고 그대로 있었어요.
그래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만 살짝 들어서 주위를 봤어요.
스라소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어미의 말이 맞았어요!
가시뭉치가 성가셔서 가버린 거예요!
그제야 안심이 된 수리는 둥글게 말았던 몸을 풀었어요. 하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꼼짝도 할 수 없었죠.
바스락 소리가 근처에서 들렸어요.
순간 또다시 두려움이 올라왔지만
다행히 수풀 속에서 나타난 건 어미였어요.
수리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숲을 헤매다 찾아온 것이었어요.
어미는 수리를 보자마자 큰 일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수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둥지에서 나갈 때 곱게 결이 맞아있던 가시가 엉망으로 흐트러져있었어요.
그리고 말할 힘도 없이 늘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죠. 등가시도 몇 개나 뽑혀있었고요.
자기를 보며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어요.
수리를 진정시키야만 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요.
어미는 힘겹게 수리를 끌고 근처 나무둥치로 옮겼어요.
원래 둥지만큼은 아니지만 급한 대로 잠시 쉴 수는 있어 보였어요.
어미는 수리를 꼭 안고 토닥여줬어요.
수리는 뭐라 웅얼거리면서 떨다가 점점 조용해졌어요.
떨림도 멎었고요.
잠이 든 건지 기절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쉬어야 하는 건 맞았어요.
어미는 수리를 꼭 안고 자신도 잠을 청했어요.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테니까요.
해 질 녘에 수리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푹 잔 것인지 괜찮아 보였답니다.
어미는 다행이라며 지난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어요.
수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있었냐니요? 평소처럼 먹이를 구하러 갔었죠."
라고 답했어요.
기억나는 것이 그것뿐이냐는 어미의 말에 더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머리만 아팠어요.
어미는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어젯밤의 수리는 정말 죽을 것 같아 보였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괴로웠던 기억이 사라졌다면 오히려 좋은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 수리는 멀쩡하니까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것이 수리를 위하는 일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그러냐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렸어요.
수리는 평소처럼 잘 다녔어요.
먹이도 혼자서 구할 수 있었고
밤풍경에 취하는 것도 여전했지요.
그런데 이따금 숨이 잘 안 쉬어질 때가 있었어요.
겁이 나긴 했지만 금방 괜찮아졌고
어미가 알면 걱정할 테니 내색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숲에서 절대 갈 수 없는 곳이 생겼어요.
이상하게도 그쪽으로만 가면 몸이 마비되듯 굳어버려서 그 근처로는 가지 않았어요.
이해할 수 없고 답답했지만 이 또한 어미가 걱정할 수 있어서 말하지 않았어요.
그쪽으로 가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리는 완전한 성체가 되었어요. 그리고 독립을 했답니다.
어미는 조금 더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수리는 다른 고슴도치들도 다 독립하는데
혼자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새로 만들었어요.
수리는 이제 혼자가 되었어요. 둥지를 만드는 것도 둥지를 잘 관리하는 것도 문제가 없었어요.
먹이를 구하러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았어요.
맛있는 먹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영역을 어떻게 지키면 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수리는 야무졌기에 다른 고슴도치들도 수리를 만만하게 볼 수 없었어요.
수리는 잘 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한 번씩 숨을 쉴 수 없었고
'그 장소' 근처에도 갈 수 없었어요.
그리고 다른 고슴도치들과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어요.
자신이 이렇다는 걸 누군가 아는 것이 싫었거든요.
몇몇 고슴도치가 다가와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지만 수리는 그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어요.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수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수리의 마음은 점점 답답해져만 갔어요.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죠.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수리는 그렇게 고독해져 갔어요.
다른 고슴도치들이 가정을 꾸려도
수리는 혼자였어요.
그게 더 나았거든요.
그렇게 수리는 혼자 나이 먹어 갔어요.
유난히 달이 환하게 빛나던 어느 날이었어요.
수리는 어릴 때 생각이 났어요.
자신이 밤풍경을 무척 좋아했었고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는 것을 말이죠.
오늘은 왠지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어요.
별은 초롱초롱 빛나고
달빛은 환해서 멀리까지도 잘 보였어요.
나뭇잎들도 달빛에 반짝이고
개울의 물결도 반짝이고 있었지요.
수리는 뭔가가 떠올랐어요.
갑자기 숨이 막히고 온몸이 떨려왔어요.
자신은 분명히 이 느낌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었어요!
바로 그 순간 바스락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수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구석에 숨었지요.
여전히 숨쉬기는 어려웠고 몸이 떨렸어요.
하지만 볼 수 있었어요! 두려움의 정체를요!
그토록 긴 시간 자신이 묻어두었던 그 두려움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스라소니는 몸을 잔뜩 낮춘 채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요.
아마 먹잇감을 뒤쫓고 있는 것일 테죠.
그 덕분에 스라소니는 수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
더 탐나는 먹이가 있는 거겠죠.
그렇게 스라소니는 수리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어요.
수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죠.
식은땀이 온몸에 흘러내렸어요.
꼼짝도 할 수 없었죠.
그리고 그날의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났어요.
자신이 얼마나 두려웠었는지, 어미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불렀는지, 그리고 고통에 잡아먹히던 순간까지 모두 떠올랐어요.
수리는 선채로 기절했어요.
아니 어쩌면 정신이 떨어져 나간 것일 수도 있지요.
정중앙에 있던 달이 서쪽으로 제법 기울고 나서야 수리는 정신이 들었어요.
스라소니는 이미 멀리 떠났습니다.
주위는 고요했어요.
자신을 위협할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위협이 저를 지나갔어요.
그리고 이번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도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았어요.
자신은 살아있어요!
수리는 갑자기 어미가 너무 보고 싶어 졌습니다.
지난겨울 어미는 떠나버렸지만
그래도 어미가 보고 싶었어요.
한달음에 어미의 둥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어요.
빈둥지만 그곳에 있었지만 그래도 어미의 냄새가 났어요.
그날 자신을 토닥여주던 어미의 손길이 하나하나 다 떠올랐어요.
어미가 자신을 얼마나 꼭 안아주었었는지도 기억났어요.
수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왜 한 번씩 숨을 쉴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 장소'에는 왜 절대 갈 수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어요.
자신은 이상했던 게 아니었어요.
자신은 상처받았을 뿐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답니다.
이제 정말로 다 괜찮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수리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했어요.
그리고 어미의 그 다정하고 따뜻한 품을 기억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