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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Feb 27. 2023

취사 중

엄마의 빈자리

"여보. 여기''이라고 쓰여있잖아.'들' 안 보여?"

잠결에도 엄마의 얘기가 어찌나 궁금하던지 벌떡 일어나 물었다.

"엄마. 무슨 소리야? '들'이 데?"

"아니. 니 아빠가 참기름 사 오랬더니 들기름을 사 왔잖아."

"아빠가 또 심부름 잘못했구나."

아빠는 나름대로 할 얘기가 있다.

"아니. 병이 다 비슷하잖아. 참기름 옆에다 들기름을 바짝 붙여놓고 파는 게 잘못이지."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큰소리를 치던 아빠는 거칠게 기름병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줘! 바꿔오면 되잖아."


결혼해서 친정에 들어가 살았던 적이 있다. 미혼일 때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과 이미 출가한 상태에서 함께 사는 건 달랐다. 직장 다니느라, 연애하느라 바빠서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도 그전보다는 철이 들었는지 예전엔 관심 없던 두 분 티격태격하 소리에 귀가 기울어졌다.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엄마 아빠는  서로의 호칭을 불러댔다.

"여보." "선희 엄마." 가끔 감정이 나쁠 땐 서로의 이름 석자를 부르기도 했다.

"여보. 김 ○○씨. 대체 당신은 왜 신던 양말을 장롱에 넣어놓는 거야?"

"그거 잠깐 신었던 거야. 놔둬."

"아니 여보. 농을 열면 꼬랑내가 진동을 한다니까. 잠깐 신었던 거라도 빨게 내놓으라고. 제발 좀."

"거참. 말 많네. 어디서 꼬랑내가 난다고 그래?"


어느 날은 밥통에 떡하니 붙어있는 종이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그 종이에는 굵은 매직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취사 중'

"엄마. 이게 뭐야? 이걸 왜 여기다 붙여놨어?"

" 아빠가 밥 하는 중간에 하도 밥통을 벌컥벌컥 열어대서 내가 붙여놨다."

다시 보'취사 중'이라는 글씨는 엄마의 마음을 담은 듯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엄마가 병석에 누워있던 기간은 5년이 넘었었고 아빠는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엄마를 찾아갔다.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입원기간이 길어져도 아빠의 정성은  한결같았다.

"여보. 이○○. 나야. 김○○."


어느 날엔가 엄마와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부르던 아빠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남편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

"아니야. 아빠만 보면 웃으시잖아."

"그건 내가 자주 오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지. 자기한테 잘하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아빠는 혼자가  후 전에 없던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있고 전에는 관심 없던 법륜스님 강의를 찾아 듣고 계신다. 늘 그랬듯 담담하게 살고 계신 듯 보인다. 겉으론...




엄마가 떠난 내 일상은 얄미울 만큼 변한 게 없다. 가끔씩 멍해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아이코.'식탁에 반찬을 다 차려놓고 밥통뚜껑을 열였는데 밥이 한 숟가락뿐이다. 밥을 안쳐놓고 밥통 곁을 맴돌다가 2분 남았다는 숫자가 보이는데도 조바심에 뚜껑에 손이 올라간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밥통에 붙여놨던 종이 생각에 멍해졌다.'취사 중'남은 2분을 기다리는 동안 두 분이 티격태격하옛날을 생각했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그토록 행복했던 일상들이 그리워졌다.


"엄마. 밥 안 줘?"

아들이 보채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취사가 완료된 지 한참이나 지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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