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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도 너무 잘 받는 약빨

억울할 정도의 편안함

by 홍시

정신과 약은 매일 점심시간마다 복용했다. 인데놀의 효과는 복용 후 1~2시간 사이가 제일 강력해서 나는 망설임 없이 인데놀 복용 타임을 점심 먹으러 나가기 한 시간 전으로 정했다.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점심시간 때 스몰토크를 하는 게 더 긴장됐고 얼굴도 더 잘 빨개졌기 때문이다. 약을 사무실에서 먹으면 그거 무슨 약이냐고 누가 물어보기라도 할까 봐 매번 물 한 컵과 바스락거리는 약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가 몰래 알약들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약을 먹었던 첫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회사 점심시간 때 처음으로 얼굴이 안 빨개진 날. 나는 보통 팀원이 밥 먹으러 가자고 말 걸 때, 뭐 먹고 싶은 메뉴 있냐고 물어볼 때, 밥 먹으러 걸어가면서, 밥 먹으면서, 밥 먹고 돌아오면서, 커피 타임 가지면서 중에 몇 번씩 얼굴이 빨개지곤 했는데 이날은 단 한 번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다. 약물의 효과는 경이로웠다. 세상에 이런 혁신적인 약물이 다 있나. 며칠 복약하며 관찰해 보니 약 먹고 나서 한두 시간 정도는 얼굴이 빨개지는 빈도수가 0에 수렴했다.


더 이상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게 두렵지 않았다. 남들처럼 때가 되면 밥을 먹으러 일어났고 동료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밥을 먹고 들어왔다. 점심시간 한 시간 동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렸다, 땀이 났다가 식었다를 반복하던 내 몸도 이제는 편안함을 느꼈다. 매일 점심시간 한 시간 전, 남몰래 약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평생 이 상태로 살고 싶다고.


하지만 인데놀을 먹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건 정말 후하게 쳐줘도 최대 3시간 정도인 것 같았다. 점심시간을 포함한 한두 시간 정도는 홍조가 거의 올라오지 않았지만 인데놀 약빨이 돌지 않을 때는 전과 같이 얼굴이 훅훅 빨개졌다. 나는 아침에는 눈도 못 마주치다가 갑자기 점심 먹을 때는 먼저 말을 걸고, 점심 때는 웃으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가 오후에는 단답만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말을 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당황스러워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신세계를 경험하고 나니 인데놀의 약효 없이 버텨야 하는 시간이 배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병원에 가서 하루 1포로 처방받은 약물을 하루 3포로 늘릴 수 있는지 물었다. 약을 먹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기대 이상으로 수월해졌는데 약효가 없을 때는 전과 똑같이 얼굴이 빨개져서 출근 직후와 퇴근 직전에는 대화를 피하게 된다고. 회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약효가 계속 돌 수 있게 인데놀을 더 복용할 수 없냐고 여쭤봤다.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던 덕일까 의사 선생님은 그럼 하루 3포 먹는 걸로 처방을 해줄 테니 한번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나는 출근해서 한번, 점심시간 한 시간 전에 한번, 퇴근하기 2~3시간 전에 한번. 이렇게 세 번 약을 먹었다. 사람들하고 말할 일이 별로 없을 거 같은 날에는 종종 2번만 먹기도 했다. 아무튼 인데놀의 약효가 업무시간 내내 은은하게 있어서 그런지 정말 얼굴 빨개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말을 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니 슬슬 말하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달변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큰 기대는 접어두길 바란다) 나는 얼굴 빨개지는 걸 보이기 싫어서 대화할 때 얼굴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었다. 시선은 바닥을 보거나 하늘을 보거나 여기저기를 탁구공처럼 갈팡질팡.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진 만큼 얼굴 빨개질 확률도 올라가기 때문에 대화를 할 때면 사람들이 제발 꼬리질문하지 않기를 바랐고 1초라도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보다 마주 보고 대화하는 데 불편함이 적었다. 얼굴이 빨개지지 않으니 대화할 때 여유도 생겼고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살펴볼 경황이 생겼다. 예전에는 궁금한 게 있어도 괜히 물어봤다가 얼굴이 빨개질까 봐, 대화가 길어지면 또 얼굴이 빨개질까 봐 안 물어보고 입을 꾹 닫고 있었는데 이제는 종종 먼저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먼저 말을 걸기도 했고 동료와 의견이 다를 때 내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다. 업무적인 교류가 없는 사람들과는 일절 말을 섞지 않았었는데 이때는 가끔 다른 팀 직원과 같이 밥을 먹거나 수다를 떨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대체 뭐가 대단히 달라졌다는 거야? 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예전에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 자체를 못 했다니까요?


기분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나는 늘 기분이 안 좋았다. 늘 우울하고 침체된 기분. 뭐 하나만 살짝 건드려져도 기분이 몹시 상했고 별거 아닌 거 같은 자극에도 폭발 직전까지 화가 울컥 치솟곤 했다. (근데 또 소심해서 표출은 못 하니 속에 화가 쌓이는 구조) 매일 같이 ‘이렇게 살 거면 대체 왜 살아야 하지?’ 하는 의문을 가지며 시간을 죽이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약을 먹은 뒤부터 점진적으로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인데놀의 효과처럼 먹은 직후 어떤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낀 건 아니었다. 그냥 인데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약을 먹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우울이 사라져 있었다. 예전처럼 별거 아닌 일에 기분이 상하거나 화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가뿐했고 전에는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지났던 출퇴근길이 이제는 아름다워 보였다. 하늘이 이렇게 파랬었나? 나무가 이렇게 푸르렀었나? 자연은 정말 아름답구나, 같은 감상을 내뱉으며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 찬 것 같은 감상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쇼킹했다.


예전에는 끝없이 땅굴을 파고 들어갔던 기분이 이제는 잔잔한 파도가 되어 차올랐다. 머리가 약간 멍해지면서 예전에는 내가 집요하게 몰두했던, 내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들에 전만큼 집중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기분 나쁜 것들에 집중이 안 되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주변에 생각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서 기분이 점차 괜찮아졌다. 나쁜 것만 집중해서 보지 않게 되니 내 주변의 좋은 것들이 보였고, 그것들이 대단하진 않아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뭔가 대단히 이루지 않아도 소소하게 일상을 꾸리며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는 걸 이때 처음 느껴봤다.


이게 우울증 없는 사람들의 삶인가?
그렇다면 나는 한평생을 손해 보며 살아온 셈이다.


누구나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죽고 싶지만 죽는 건 무서우니 마지못해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이렇게 일상 속 작은 행복을 느끼면서 잔잔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니. 머리를 토르 망치로 세게 후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이때 정말로 조금이라도 일찍 정신과 약을 먹을 걸 그랬다고 속으로 몇 번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겠지만 내 속에서는 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약 3년을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지냈다. 더 이상 전만큼 회사생활이 힘들지도 않았고 사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이 무렵 코로나 유행이 시작하면서 나는 재택과 출근을 반복하며 지냈는데, 약을 먹은 것도 있지만 사람을 전보다 덜 볼 수 있어서 상태가 더 좋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내 인생에서 최고로 걱정 없이 지냈던 3년으로 꼽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약이 전만큼 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을 먹어도 얼굴이 다시 빨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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