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
사회불안 진단을 받은 건 5년 남짓 됐지만 언제부터 이 질환이 나와 함께한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날 때부터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힘들어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대한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간간히 올라왔던 홍조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드름 때문에 가뜩이나 피부가 빨갰는데 누가 말만 걸면 홍조가 훅훅 올라오는 바람에 시한폭탄 토마토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점점 말수가 없어졌고 누가 나한테 말을 걸 것 같으면 자리를 피했다. 보수적으로 잡아 이때부터 사회불안이 있었다고 해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 넘게 회피형 토마토로 잘 살아놓고 왜 병원을 갔냐고 묻는다면 그동안 ‘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다. 20대 때는 ‘사람이 싫다’는 핑계로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직면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싫어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내 과업을 해내야 했다. 스트레스는 엄청나게 받는데 더 이상 회피도 못하고, 퇴근하고 나면 체력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해결 방법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약물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정신과에 가보자는 거였다. 혹시 면접약으로 유명한 인데놀을 아는가? 인데놀은 원래 부정맥, 고혈압 등 심혈관질환이 있는 환자들이 복용하는 약인데 심박수를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 면접 때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탄 약이었다. 나 또한 면접 때 일회성으로 내과에서 인데놀을 처방받아 복용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강력한 효과를 봤던 게 기억났다. 대화할 때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는 걸 그날 절감했다. 임원들 앞에서 떨지 않는 나라니, 대단하잖아?
아무튼 나는 인데놀이 내 홍조의 구원투수가 되어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인데놀 처방이 가능한 병원들 중 정신과가 가장 나의 상태를 잘 살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신과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정신과에 가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셀럽들이 매체에 나와 자신의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시대라지만 정말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지 끊임없는 의구심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5년이 지난 지금, 정신과 진료 기록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기억은 전무하다. 다만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으면 보험 신규 가입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보험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가입 계획이 있는 보험은 미리 가입하는 등 보험 점검을 모두 마친 후 정신과에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나 또한 보험은 이미 다 가입해 둔 상태에서 정신과 진료를 봤다.
가기로 마음만 먹으면 바로 정신과 진료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과 예약은 생각보다 박 터지는 경쟁률을 자랑했다. 겨우 진료 예약을 잡고 정신과에 방문했을 때도 병원 대기실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주변에 보이지만 않았을 뿐 생각보다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흔하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됐던 것 같기도 하다.
심리 검사를 마치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대인관계 항목은 반드시 문제가 있다고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관련 질문들에 ‘매우 그렇다’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다’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 대하는 게 극도로 힘들어서 정신과까지 왔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더 난감하긴 했다.
“사회불안장애와 우울증이 있으시네요.”
사회불안장애. 어떤 건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병명에서 유추되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확신은 없어 아리송한 얼굴로 앉아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설명을 이어해 주셨다.
“사회공포증, 대인기피증 같은 거 들어보셨죠?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일상에 피해가 있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뭔가 할 때 과하게 긴장하고 불안해해서 그런 상황을 자꾸 회피하려고 하죠.”
의사 선생님은 그래서 어떤 점이 불편해서 찾아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회사에서 동료와 대화할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서 힘들다고 토로했다. 업무 얘기 할 때도 빨개지긴 하지만 잡담을 할 때 훨씬 더 잘 빨개져서 사람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된다고. 의사 선생님은 그럴수록 자리를 피하지 말고 더 부딪혀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니면 회사 사람들하고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 없지 않냐며 업무 얘기만 하고 굳이 사적인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상담이 다 끝나고 의사 선생님은 처방할 약물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항우울제, 항불안제, 위장약까지 해서 총 세 알. 처방 약물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급히 질문했다.
“저기… 인데놀 추가는 안 될까요?”
아니면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약물이라도요. 내가 의사도 아닌데 내 멋대로 약물 추가를 요청해도 될까 싶었지만 불가능하면 알아서 거절하시겠지 싶었다. 정신과에 온 목적 자체가 인데놀인데 인데놀 처방도 못 받고, 처방을 못 받는 이유도 설명 못 듣고 가면 아쉬움이 남을 거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고 면접 때 인데놀을 복용하고 내가 원하는 효과를 봤다고 설명드렸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그럼 인데놀도 함께 먹어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진료는 끝났다. 정신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과에 가면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문제의 원인을 찾고 치료해 나갈 일만 남았다는 거? 만족스럽게도 정신과에서 받은 약물의 효과는 굉장했다.
약빨이 이렇게까지 잘 받는다니, 진작 올 걸!
하지만 인생은 늘 그렇듯 내 마음대로 평탄하게 흘러가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