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발견의 항해에 관한 호기심에 불을 지핀 것은 인쇄의 폭증이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대중이 점차 늘어나면서 세계에 관해 더 알고 싶은 욕구도 커졌다. 마르코 폴로의 <일 밀리오네>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인쇄되었다. 1505년에 화보를 곁들여 제작된 아메리고 베스푸치 서한의 브로드시트broadsheet 인쇄물은 몇 년 만에 25쇄를 찍었다. (중략) 지도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은 강렬했고, 지구의가 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지구를 하나의 실체로서 살펴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속의 인간의 위치를 바꾸는, 정신을 강타하는 재조정이었다. 1548년 이탈리아의 지도제작자이자 천문학자 자코모 가스탈디는 최초의 '포켓북' 지도책을 제작했다. 이제 세계를 손 안에 쥐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의에서는 세계를 돌릴 수도 있었다. 세계를 하나의 실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과 향신료 제도까지도.
로저 크롤리 [욕망의 향신료 제국의 향신료]
한반도에서도 일찌감치 인쇄기술이 꽃피었다. 금속활자도, 목판인쇄 기술도 늦지 않게 가졌다. 하지만 그 활자로 찍어낸 것은 결국 종교 경전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 그렇고 팔만대장경이 또한 그러하다.
반면 유럽에서는 매우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활자들을 찍어내어 사람들이 돌려 읽었다. 읽고 꿈 꾸고 도전하고 결국엔 이루었다.
저들이 '정신을 강타하는 재조정'을 만끽할 때, 우리의 정신은 갇힌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아직도 중세를, 전근대를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정치를 둘러싸고 종종 라스푸틴이 소환되고 샤머니즘이 호명되는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특히 궁지에 몰리면 짐짓 과학을 부르대곤 하지만 우리는 정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