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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Oct 08. 2024

밤 10시, 집주인이 달려왔다

서울에서는 열쇠로 문을 잠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파트 출입문은 디지털 도어락이다. 1층의 공동 현관은 출입 카드가 든 머니클립만 대면 마법처럼 스르르 열린다. 자동차도 언제부터인지 키를 꽂아 돌리는 형태가 아니다. 주머니든 가방 안에든 키를 갖고 다니기만 하면 시동을 걸고 끌 수 있다. 간혹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 귀찮음은 있을지언정 열쇠를 찾느라 법석을 떠는 일은 거의 없었다.


런던에 와서부터는 늘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 빌런 A네 첼시 에어비앤비도 그랬고 지금 사는 집도 그렇다. 공동현관 열쇠 하나, 그리고 집 현관 열쇠 하나. 섬네일에 있는 저렇게까지 고풍스러운 열쇠는 아니라도 아무튼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


첼시의 비앤비 빌런은 울타리에 열쇠 보관함 두 개를 걸어뒀다. 내가 열쇠를 집안에 놓고 나가면 울타리에 있는 다른 상자에서 열쇠를 꺼내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빌런도 똘똘한 면이 있고 기특하고 고마운 구석이 있다.


열쇠는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다. 때때로 열쇠를 집 안에 놓고 나가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다. 지금은 열쇠가 두 벌이라 아내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초반엔 열쇠가 한 벌 뿐이었다. 놓고 나온 날은 정말 큰 낭패였다.


큰일은 6월에 벌어졌다. 6월 11일, 세 식구가 함께 나왔는데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저녁 8시쯤이었을까?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고 또 뒤졌다. 없다. 없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전화 한 통이면 금새 열쇠공이 출동해서 문을 따줄 텐데. 생돈이라 아깝긴 해도 돈도 얼마 안 깨지는데. 심지어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는데. 여기선 어찌 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혔다.


집 밖에 망연히 서 있다가 일단 아무 집이나 초인종을 눌렀다. 공동현관 안에라도 들어가자. 들어와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다. 세컨 플로어의 A 아저씨는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당장 자기 집으로 들어오란다. 저녁은 먹었냐며, 니 딸과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며 올라와서 뭐라도 좀 마시며 쉬란다. 아니 A, 고마워 정말. 고마운데 난 내 집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어.


"음 일단 관리인한테 연락해보자. 내가 T 연락처 갖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난 얼굴을 보면 꼭 인사를 나누곤 하는 관리인 연락처도 없었다. 그래 일단 전화번호를 받자. 전화했더니 T는 근처에 있었다. 주로 오후 2시쯤 나타나는 관리인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한다.


T는 어디선가 열쇠 뭉치가 가득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왔다. 열쇠가 정말 수백 개 쏟아져 나왔다. 제발 있어라. 우리 집 열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나. 없다. 그 많은 열쇠 가운데 우리집 열쇠는 없다.


안 되겠다. 아내와 아이는 임페리얼컬리지 도서관 매점에 가서 앉아 있기로 했다. 도서관은 24시간 운영되고, 매점도 항상 열려 있다. 그래 모두가 고생할 필요는 없다. 해결책은 내가 찾으면 된다. 뭐라도 마시면서 좀 쉬어.

이미지 flickr

A는 현관문 자물쇠 제작 회사가 콜센터를 운영한다면서 연락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T는 고개를 저었다. "너 거기 연락하면 수백 파운드는 깨질 거야. 돈이 들더라도 해결만 되면 좋은데 지금은 밤이라는 걸 생각해. 기껏 기술자가 나와서는 결국 안 된다고 할 거야. 요즘 런던은 그 모양이야.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게 비싸다고." 해결이 되든 안 되든 심야에 출장을 누군가 나온다는 건 비용은 그만큼 고스란히 다 내야 한다는 뜻이라며 혀를 찼다.


A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럼 어쩌면 좋으냐며 나를 위로한다. T는 '창문을 열고 들어가보자'고 한다. 그래 우리집은 그라운드 플로어니까 창문이 열려 있기만 하다면 들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늘 창문을 잠그고 다닌다고.


"창문이 다 잠겨 있는 거 확실해?" 응 확실해. 아니다 주방 창문은 적어도 내가 잠그지는 않았어. 잠그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그게 안 잠겨 있을까 설마? "그러기를 바라. 네 딸이 오늘 편안히 자려면."


T는 로어 그라운드에 사다리를 세우고 우리집 주방 창문에 접근했다. 실패. 주방 창문도 잠겨 있다. 우리는 왜 이리 꽁꽁 문단속을 하고 산단 말인가? 별 게 다 후회 된다.


유리를 한 장만 깨고 들어가면 어때? 사다리를 세운 김에 말이야. "꿈도 꾸지 마. 차라리 열쇠공을 부르는 편이 비용도 시간도 적게 들 걸? 유리 끼우는 데 며칠이 걸릴지 알 수가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문을 밀어보느라 온몸이 먼지 투성이가 된 관리인 T는 진지하다.


"그러지 말고 집 주인한테 연락을 해보지 그래?" 관리인 T가 말했다. 부동산 중개업체에서도 여분 열쇠를 갖고 있을 수 있다고. "집 팔려면 매수 희망자들한테 집 보여주려고 아마 열쇠 들고 다닐 거야. 아니면 집주인은 확실히 여분 열쇠가 있을 거 아냐?"


그래 이 마당에 뭘 가린단 말인가.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호텔을 잡아야 할까? "M, 늦은 시간에 미안해. 혹시 당신 스페어 키를 좀 빌려줄 수 있어? 우리 열쇠를 놓고 집 문을 잠갔어. 아내도 아이도 밖에 있는 상태야."


이럴 수가. 1분도 안 지났는데 M할배가 바로 왓츠앱으로 회신했다. "내가 집 내놓은 부동산 업체에 연락해뒀어. 너네 집 쪽으로 갈 수 있는 직원이 있는지 수배 중이야. 기다려봐."

만일 걔네 사무실에 열쇠가 있는데 여기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갈 수도 있어. 부동산 업체에 내가 직접 연락을 해볼까? "ㅇㅇ 그래 그럼. 연락처 줄게."

하지만 부동산 직원들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도 없다. 젠장.


밤 9시 37분. 집주인 할배 M의 전화. "내가 지금 너네 집 쪽으로 가는 길이야. 30분 안에 도착할 거야." 뭐라고 직접 온다고? 당신 집은 여기서 한 시간 거리잖아? "10살짜리 여자 아이가 이 시간에 집 밖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빨리 아이를 집에 들여보내자. 나 운전해야 하니까 끊어."


역시 어린이들 안전에 대해서라면 영국인들은 확 예민해지는구나. M은 부동산 업체에 연락을 해 두고는 일단 집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혹시 몰라서. 그리고 진짜 거짓말처럼 내가 연락한지 1시간도 안 돼서 문을 열어줬다. 아니 이 할아버지는 이렇게 따뜻할 일인가?


“M, 정말 고마워. 나 당신 그냥 못 보내겠어. 마침 내가 더블린에서 사온 위스키가 있는데 받아줘."


아일랜드 할배는 아이리시 위스키라니까 반색하면서도 "절대 한 병을 받아가지는 않을 거야. 여행 가서 너 마시려고 사온 거 같은데 네가 마셔야지."라며 버텼다. 딱 한 잔만 달라고. 운전한다는 양반이? ㅎㅎ

M은 다시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냥 가겠단다. ‘진짜 위스키는 스카치가 아니라 아이리시’라면서.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어깨를 툭 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열쇠는 두 벌이 있어야 마땅하다면서 자기 스페어키까지 남기고.


6월 11일 밤은 런던에 온 이래 가장 마음이 따뜻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영국인들은 디지털 도어록을 왜 달지 않는지, 그 편리한 걸 왜 외면하는지, 이 무겁고 둔한 나무문을 언제까지 고집할지.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잃어버리거나 집안에 놓고 나오기 십상인 이 열쇠는 성가시단 말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해 되기도 하다. 캔싱턴 거리의 이 예쁜 하얀 조지안 양식 집들, 그 집의 오래된 현관문에 디지털 도어록은 잘 안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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