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열쇠로 문을 잠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파트 출입문은 디지털 도어락이다. 1층의 공동 현관은 출입 카드가 든 머니클립만 대면 마법처럼 스르르 열린다. 자동차도 언제부터인지 키를 꽂아 돌리는 형태가 아니다. 주머니든 가방 안에든 키를 갖고 다니기만 하면 시동을 걸고 끌 수 있다. 간혹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 귀찮음은 있을지언정 열쇠를 찾느라 법석을 떠는 일은 거의 없었다.
런던에 와서부터는 늘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 빌런 A네 첼시 에어비앤비도 그랬고 지금 사는 집도 그렇다. 공동현관 열쇠 하나, 그리고 집 현관 열쇠 하나. 섬네일에 있는 저렇게까지 고풍스러운 열쇠는 아니라도 아무튼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
첼시의 비앤비 빌런은 울타리에 열쇠 보관함 두 개를 걸어뒀다. 내가 열쇠를 집안에 놓고 나가면 울타리에 있는 다른 상자에서 열쇠를 꺼내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빌런도 똘똘한 면이 있고 기특하고 고마운 구석이 있다.
열쇠는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다. 때때로 열쇠를 집 안에 놓고 나가기라도 하면 방법이 없다. 지금은 열쇠가 두 벌이라 아내가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초반엔 열쇠가 한 벌 뿐이었다. 놓고 나온 날은 정말 큰 낭패였다.
큰일은 6월에 벌어졌다. 6월 11일, 세 식구가 함께 나왔는데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저녁 8시쯤이었을까?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고 또 뒤졌다. 없다. 없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전화 한 통이면 금새 열쇠공이 출동해서 문을 따줄 텐데. 생돈이라 아깝긴 해도 돈도 얼마 안 깨지는데. 심지어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는데. 여기선 어찌 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혔다.
집 밖에 망연히 서 있다가 일단 아무 집이나 초인종을 눌렀다. 공동현관 안에라도 들어가자. 들어와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다. 세컨 플로어의 A 아저씨는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당장 자기 집으로 들어오란다. 저녁은 먹었냐며, 니 딸과 아내는 어디에 있느냐며 올라와서 뭐라도 좀 마시며 쉬란다. 아니 A, 고마워 정말. 고마운데 난 내 집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어.
"음 일단 관리인한테 연락해보자. 내가 T 연락처 갖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난 얼굴을 보면 꼭 인사를 나누곤 하는 관리인 연락처도 없었다. 그래 일단 전화번호를 받자. 전화했더니 T는 근처에 있었다. 주로 오후 2시쯤 나타나는 관리인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한다.
T는 어디선가 열쇠 뭉치가 가득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왔다. 열쇠가 정말 수백 개 쏟아져 나왔다. 제발 있어라. 우리 집 열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나. 없다. 그 많은 열쇠 가운데 우리집 열쇠는 없다.
안 되겠다. 아내와 아이는 임페리얼컬리지 도서관 매점에 가서 앉아 있기로 했다. 도서관은 24시간 운영되고, 매점도 항상 열려 있다. 그래 모두가 고생할 필요는 없다. 해결책은 내가 찾으면 된다. 뭐라도 마시면서 좀 쉬어.
A는 현관문 자물쇠 제작 회사가 콜센터를 운영한다면서 연락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T는 고개를 저었다. "너 거기 연락하면 수백 파운드는 깨질 거야. 돈이 들더라도 해결만 되면 좋은데 지금은 밤이라는 걸 생각해. 기껏 기술자가 나와서는 결국 안 된다고 할 거야. 요즘 런던은 그 모양이야.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게 비싸다고." 해결이 되든 안 되든 심야에 출장을 누군가 나온다는 건 비용은 그만큼 고스란히 다 내야 한다는 뜻이라며 혀를 찼다.
A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럼 어쩌면 좋으냐며 나를 위로한다. T는 '창문을 열고 들어가보자'고 한다. 그래 우리집은 그라운드 플로어니까 창문이 열려 있기만 하다면 들어갈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늘 창문을 잠그고 다닌다고.
"창문이 다 잠겨 있는 거 확실해?" 응 확실해. 아니다 주방 창문은 적어도 내가 잠그지는 않았어. 잠그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그게 안 잠겨 있을까 설마? "그러기를 바라. 네 딸이 오늘 편안히 자려면."
T는 로어 그라운드에 사다리를 세우고 우리집 주방 창문에 접근했다. 실패. 주방 창문도 잠겨 있다. 우리는 왜 이리 꽁꽁 문단속을 하고 산단 말인가? 별 게 다 후회 된다.
유리를 한 장만 깨고 들어가면 어때? 사다리를 세운 김에 말이야. "꿈도 꾸지 마. 차라리 열쇠공을 부르는 편이 비용도 시간도 적게 들 걸? 유리 끼우는 데 며칠이 걸릴지 알 수가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창문을 밀어보느라 온몸이 먼지 투성이가 된 관리인 T는 진지하다.
"그러지 말고 집 주인한테 연락을 해보지 그래?" 관리인 T가 말했다. 부동산 중개업체에서도 여분 열쇠를 갖고 있을 수 있다고. "집 팔려면 매수 희망자들한테 집 보여주려고 아마 열쇠 들고 다닐 거야. 아니면 집주인은 확실히 여분 열쇠가 있을 거 아냐?"
그래 이 마당에 뭘 가린단 말인가.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호텔을 잡아야 할까? "M, 늦은 시간에 미안해. 혹시 당신 스페어 키를 좀 빌려줄 수 있어? 우리 열쇠를 놓고 집 문을 잠갔어. 아내도 아이도 밖에 있는 상태야."
이럴 수가. 1분도 안 지났는데 M할배가 바로 왓츠앱으로 회신했다. "내가 집 내놓은 부동산 업체에 연락해뒀어. 너네 집 쪽으로 갈 수 있는 직원이 있는지 수배 중이야. 기다려봐."
만일 걔네 사무실에 열쇠가 있는데 여기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갈 수도 있어. 부동산 업체에 내가 직접 연락을 해볼까? "ㅇㅇ 그래 그럼. 연락처 줄게."
하지만 부동산 직원들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도 없다. 젠장.
밤 9시 37분. 집주인 할배 M의 전화. "내가 지금 너네 집 쪽으로 가는 길이야. 30분 안에 도착할 거야." 뭐라고 직접 온다고? 당신 집은 여기서 한 시간 거리잖아? "10살짜리 여자 아이가 이 시간에 집 밖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빨리 아이를 집에 들여보내자. 나 운전해야 하니까 끊어."
역시 어린이들 안전에 대해서라면 영국인들은 확 예민해지는구나. M은 부동산 업체에 연락을 해 두고는 일단 집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혹시 몰라서. 그리고 진짜 거짓말처럼 내가 연락한지 1시간도 안 돼서 문을 열어줬다. 아니 이 할아버지는 이렇게 따뜻할 일인가?
“M, 정말 고마워. 나 당신 그냥 못 보내겠어. 마침 내가 더블린에서 사온 위스키가 있는데 받아줘."
아일랜드 할배는 아이리시 위스키라니까 반색하면서도 "절대 한 병을 받아가지는 않을 거야. 여행 가서 너 마시려고 사온 거 같은데 네가 마셔야지."라며 버텼다. 딱 한 잔만 달라고. 운전한다는 양반이? ㅎㅎ
M은 다시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냥 가겠단다. ‘진짜 위스키는 스카치가 아니라 아이리시’라면서.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어깨를 툭 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열쇠는 두 벌이 있어야 마땅하다면서 자기 스페어키까지 남기고.
6월 11일 밤은 런던에 온 이래 가장 마음이 따뜻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영국인들은 디지털 도어록을 왜 달지 않는지, 그 편리한 걸 왜 외면하는지, 이 무겁고 둔한 나무문을 언제까지 고집할지.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잃어버리거나 집안에 놓고 나오기 십상인 이 열쇠는 성가시단 말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해 되기도 하다. 캔싱턴 거리의 이 예쁜 하얀 조지안 양식 집들, 그 집의 오래된 현관문에 디지털 도어록은 잘 안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