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오스카 시상식장에 가도 되겠네!" 우리 사진을 본 영국인 형님 J가 크게 놀랐다. 내가 턱시도를 입어본 게 언젯적 일인가. 결혼식날 이후로 처음이다.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파티 공지가 왔을 때, 사실 드레스 코드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저 공식적인 자리니까 양복을 입고 가면 되려니 하는 느긋한 마음이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양복은 한 벌 챙겨왔고 심지어 갈색 구두까지 가져오지 않았냐!' 생각했다. 한국에서 어느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양복에 타이를 매면 되었기에.
나와는 달리 아내는 며칠 전부터 전전긍긍이었다. 드레스코드가 무려 블랙 타이라면서. 알고보니 걱정할 만했고... 우리는 당일 오전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급하게 백화점으로 달려가야 했다.
영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포멀' 드레스 코드가 다섯 가지 정도 된단다. 화이트 타이, 블랙 타이, 모닝 드레스, 칵테일 드레스, 라운지 수트.
화이트 타이는 이브닝 드레스나 풀 드레스, 테일스라고도 한다. 꼬리 긴, 연미복을 입고 말 그대로 흰 색 보타이, 즉 나비 넥타이를 매는 복장이다. 가장 포멀하지만 최근엔 거의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10월 5일에 조성진 님과 협연한 베를린필 단원들의 드레스코드가 화이트 타이였다.
블랙타이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턱시도를 입는 것. 보통의 양복은 안 된다. 규칙은 깐깐하다. 셔츠는 흰색 드레스 셔츠여야 한다. 일반적인 셔츠보다는 장식적인, 마르셀라 프론트가 있으면 더 좋다. 셔츠의 깃은 보타이를 매기 좋은 윙칼라여야 한다. 소매는 더블-커프트로 마감되어야 하고 커프링크스로 여민다.
바지는 검은색, 몸에 잘 맞아야 한다. 잘 다려져 있어야 하고 다리통 바깥쪽에는 브레이드나 세틴 원단 한 줄이 세로로 있어야 한다. 한국 사관학교 생도들의 정복과 예복 바지, 심지어 스포츠 브랜드 일부의 트레이닝복 바지에 있는 옆선이 모두 블랙타이 복장의 특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발은 검정색 구두. 물론 잘 닦여 있어야 한다. 벨벳 재질의 슬리퍼를 신을 수도 있으나 과시한다는 인상을 주게 될 수도 있다나. 일단 어지간한 사람은 스스로 견디기가 쉽지 않겠으나.
재킷은 디너 재킷이라고 한다. 옷깃을 새틴으로 장식한다. 바지 옆줄을 새틴 원단으로 장식하는 것처럼. 통상 바라테아 울(barathea wool) 재질로 제작한다. 일반적으로 검정색 재킷이지만 다른 색깔을 입어도 무방하다. 튀고 싶다면.
"흰 양말은 절대 안 돼!" 아일랜드 출신 할아버지 로이는 양말 색도 신경 쓰라고 했다. 양말은 소품이지만 모든 걸 망칠 수 있다고. 무늬 필요 없고 그냥 검정 양말을 신자.
가격이야 천차만별. 나는 급하게 막스앤스펜서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바지와 재킷을 합쳐 110파운드. 드레스셔츠와 보타이가 함께 있는 세트가 40파운드, 그리고 검정색 구두 90파운드. 대략 40만 원에 한 세트를 갖췄다. 바지는 허리 치수 뿐 아니라 길이 별로 세심하게 롱, 미디엄, 숏으로 세팅 되어 있어서 수선조차 필요 없었다. (나는 롱을 입고 싶었다) 셔츠도 마찬가지.
이브닝 드레스라고도 한다. 긴 말 필요 없다. 여성용 블랙 타이는 '길다'는 뜻이다. 적어도 무릎 아래로는 내려가야 한다. 바닥을 쓸고 다닐 정도로 길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화이트 타이 파티라면 여성 참석자들이 바닥 청소를 담당한다) 물론 중간 길이라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겠으나, 다른 참석자들의 시선을 견뎌야 할 수 있다.
너무 짧거나 몸이 지나치게 많이 드러나는 드레스는 권장되지 않는다. 블랙 타이 행사는 매우 격식 있는 자리다.
신발은 일반적으로 힐을 고려한다. 키튼 힐, 스트랩 스틸레토 또는 블록 힐 샌들이 권장된다. 힐을 오랜만에 신는 엄마들은 파티 내내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며 울상이었다. 힐을 신지 않으려면 귀여운 벨벳 메리 제인을 선택할 수 있다. 단순한 디자인의 단색 신발보다는 반짝이는 재료로 장식된 신발이 보다 유리하다.
장신구를 적절히 활용한다. 반드시 값비싼 브랜드의 시계나 초고가의 화려한 보석일 필요는 없다. 실내가 어두컴컴하다면 어차피 잘 안 보인다. 하지만 특히 어두운 계열 색깔의 옷을 입는다면 반짝이는 장신구가 도움이 된다.
클러치백도 고려할 수 있다. 이브닝 드레스 자체가 크게 화려하지 않다면 클러치백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장신구든 백이든 포인트가 될 적절한 물건을 고른다.
물론 드레스도 치마도 싫다면 바지를 입어도 무방하다. 다만, 아래 위가 세트인 한 벌을 입는 게 좋다. 격식 있는 자리니까.
아내는 대략 500파운드로 프릴 드레스와 반짝이 하이힐을 갖췄다.
파티에 갔더니 거의 대부분의 아빠들과 남자 선생님들은 턱시도, 엄마들과 여자 선생님들은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간혹 양복 차림의 아빠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튀긴 튀었다. 생각보다 드레스 코드는 매우 엄격하고 또 중요하다. 오늘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