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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Oct 17. 2024

좋아서 걷는 것만은 아닙니다만

런던에 온 뒤로 많이 걷고 있다. 스마트폰이 측정한 올해 하루 평균 걸음 수는 9,640걸음이다. 2023년에는 하루에 평균 6,503걸음씩 걸었으니까 50%쯤 늘어난 수치다.


서울에선 좀처럼 걷게 되질 않았다

서울에서는 회사 바로 앞에 집이 있어서 출퇴근은 도어 투 도어로 3분 컷이었다. 차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멀리 어딜 움직이면 주차장에 내려가서 시동을 걸면 그만이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지 않으면 하루 3천 걸음도 안 걷는 날도 적잖았다. 평균 걸음이 6천 보라도 넘은 것은 시시때때로 공원이라도, 강 둔치라도 걸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앉아서 일하다가 죽지 않으려고 걸었다면 지나칠까.


요즘엔 도시 하천 변에 걷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고 공원마다 어느 학교 운동장마다 걷는 분들이 많기는 하다. 산 주변에도 그렇게 둘레길들을 조성하고. 맨발 걷기는 또 왜 이리 유행인가?


하지만 서울 거리를 걷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겁지만은 않다. 길은 복잡하고 차는 너무 많으며, 그래서 공기 질도 좋을 리 없다. 번화가에선 다른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힌다. 도시 계획은 차가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도로를 넓게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차량 흐름을 원활하게 하게 위해 고가도로를 짓고 터널을 파고 한강의 남북에, 또 서울을 빙 둘러 자동차 전용도로를 붙였다. 사람이 차를 피해 걸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성질 급한 운전자는 빵빵 경적을 울려대거나 창문을 내리고 고함을 치고 삿대질을 하기 일쑤다. 거리의 건물들은 저마다 제각각 설계되었고, 간판은 눈을 어지럽힌다.


그래서, 나는 잘 걷지 않게 되었다. 맞다 핑계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런던은 다르다.


아름다운 공원들과 가든들

긴 말 필요 없다. 구글맵으로 런던 지도를 보시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곳곳에 멋진 공원과 가든들이 있다. 캔싱턴에는 하이드파크와 캔싱턴 가든스(캔싱턴 궁에 딸린 정원. 하이드파크만 하다)가 있다. 첼시 넘어 강 건너 배터시 파크(화력발전소를 고쳐 쇼핑몰로 사용하는 배터시 파워스테이션이 바로 길 건너에 있다)와 메릴본 북쪽 리젠트파크(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박람회 중 하나인 프리즈 런던이 매년 이곳에서 열린다)도 규모가 상당하다. 그밖에도 곳곳에 작은(지도로 볼 때나 작지 실제로 걸으면 크기가 상당하다) 녹지들이 있다. 

캔싱턴 가든스. 저 멀리 아스라히 보이는 건물이 캔싱턴 궁이다. 이러다 지평선 보일라. 이미지 S.A.W. Pixels.

이 대도시에서 차를 거의 보지 않고 녹지로만 걸을 수 있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홀란드 파크부터 사우스뱅크센터까지 걷는 경로를 검색하면 7.7킬로미터 정도 된다. 이 거리를 거의 녹지만 보며 걸을 수 있다.


홀란드 파크-캔싱턴가든스-하이드파크-그린파크-세인트제임시스파크-빅토리아앰뱅크먼트가든(국방부 건물 앞에는 한국전쟁 참전기념탑이 있다)-그리고 보행교인 골든주빌리브리지까지.


그냥 가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난 녹지 규모에 한번 놀라고, 아름다운 조경에 두 번 놀라고, 잔디밭 출입금지 따위는 없는 자유로움에 세 번 놀라면서 걸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이런 녹지들 말고도, 출입 카드 있는 사람들만 누리는 프라이빗 가든이 곳곳에 있다. 개인 마당 혹은 정원이라는데 역시 크고 아름답게 꾸며졌다. 프라이빗 가든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 받은 적이 있는데, 이곳이 런던인지 어느 한적한 교외인지 헷갈릴 정도로 평화롭고 안전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웠다.


다만, 일단 해가 지고 나면 공원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한다. 런던 도심 거리에서는 대낮에도 값비싼 스마트폰을 낚아채가는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최근에는 한동안 칼부림 사건이 잇따르기도 했다. 캔싱턴가든스 같은 곳은 아예 출입문을 잠가 놓기도 한다. 목숨이 9개쯤 되는 분이 아니라면 어두운 공원 산책은 시도하지 마시길. 


건너기 딱 좋은 좁은 도로

런던에 와서 신기했던 게 넓은 도로가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내가 주 서식지인 캔싱턴 주변을 잘 벗어나지 않아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라는 점은 인정하고 시작하자. 내 동선은 주로 캔싱턴에 국한되어 있다. 기껏해야 옥스퍼드 서커스나 피카딜리 서커스, 소호, 러셀 스퀘어 쪽에 나가거나 이런저런 공연장들(사우스뱅크센터, 바비칸센터, 위그모어홀)을 오가는 정도니까.


아, 저가 항공 타러 스탠스테드 공항이나 루튼 공항 같은 곳 갈 때는 꽤 넓은 도시고속도로를 이용하긴 하는구나. 그런 도로 말고는 건너기 힘든 넓은 길 자체가 많지 않다. 소호 주변은 전세계에서 밀려든 여행자들로 늘 터져나갈 것만 같고 교통 흐름은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도로는 한결같이 왕복 2차선 같은 4차선이다. 도로가 좁아서 한 방향에 두 개 차로가 뻥 뚫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 좁은 길에서 2층버스를 어떻게 운전하는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넣어야 한다.


거기에 도로 중앙에 혹은 가장자리에 분리대가 설치된 곳이 거의 없다. 중앙에 교통섬을 둬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해둔 곳도 많다. 단차를 올린 섬까지는 아니어도 공간을 남겨서 행인이나 자전거 오토바이가 서 있을 수 있는 곳도 적잖다. 언제 어디로든 길 건너기가 좋다. 차는 뭐. 천천히 다녀야지 도리 없다.

피카딜리 서커스 주변 도로. 차는 많고 길은 저렇게 좁아서 늘 막힌다. 이미지 flickr

반면, 인도는 넓다. 굉장히 여유롭다. '인도를 이렇게 넓게 만든다고?'할 정도로. 캔싱턴도 소호 쪽 도심 거리도 보도블록이 아주 잘 깔려서 걷기 편하다. 우리도 보도블록을 좀 크게 만들면 어떨까? 벽돌처럼 작은 보도블록은 아무래도 울퉁불퉁해진다. 큰 블록이 까는 작업은 좀 힘들지 몰라도 보기 좋고 걷기 편한데. 인도에서 스케이트 보드나 킥보드 타는 친구들 봐도 정말 쭉쭉 잘 나간다.


런던에서도 인도와 차도 사이에는 물론 경계석이 있고 단차를 뒀지만, 곳곳에 경사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도, 유아차를 미는 사람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편하도록. 하여튼 보행자 천국이다.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춤

인프라만큼 중요한 게 문화다. 영국 도로에서는 사람이 최우선 통행권을 갖는다. 보행자가 도로 쪽에 나와서 서 있기만 해도 다가오던 차들이 대개 멈춘다. 횡단보도라면 100%.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 보행자가 눈치를 보고 있어도 꽤 높은 확률로 다가오던 차가 속도를 줄이며 상향등을 깜빡인다. 런던 도로에서 상향등은 '너 죽으려고 환장했냐? 싸우자! 덤벼라!'가 아니다. '내가 양보할게. 너 먼저 가.'라는 뜻이다. 고맙다고 손 한 번 들어주고 쿨하게 건너면 된다.


차량은 예외 없이 신호를 지킨다. 건너는 사람이 없어도 빨간 신호등에는 무조건 멈춘다. 보행자는? 아무 때나 건넌다.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면 곤란하겠으나, 설령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운전자가 두 팔을 치켜들며 불만을 표시할지언정, 일단은 멈춰서 보행자를 보호한다. 법으로 따져도 보행자는 우선권이 있고, 그보다 사람의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원칙에 대한 합의와 공감이 런던 거리에 흐른다. 


런던에 무단횡단은 없다

한동안 길 건너기를 무서워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매우 용감해졌다. 이젠 런더너보다 빨리 차도에 내려서서 길을 건너기 시작한 거다. 우린 빨리빨리의 민족 아닌가. 하지만 10살 딸래미는 아주 질색을 한다. 강아지 목줄이라도 채울 태세다. "아빠를 좀 묶어놔야겠어. 아무 데서나 차도로 튀어나가잖아!" 미안해 딸. 아빤 이게 너무 좋아. 정말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잖아. 이건 무단횡단이 아니라고. 런던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어!

실제로 저렇게 사람들이 막 길을 건넌다. 이미지 flickr

운전자들은 불만이 많기는 하다. 사람들이 차 앞으로 막 들어오니까. 언젠가 탔던 우버 기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엄청나게 투덜거렸다. "저 사람 보세요. 차 앞으로 그냥 막 오잖아요. 사고 내기 싫으면 알아서 멈추라는 건가요? 런던 도로는 무법천지예요." 


사고가 잦을 것 같지만 아니다. 영국은 치명적인 보행자 사고가 오히려 적다. 한국보다 훨씬. 2021년 기준으로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은 인구 10만 명당 한국이 1.2명. 영국은 꼭 절반이다. 0.6명.


그래도 조심할 것은 있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차량 운행 방향이 한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살펴야 하는 쪽을 안 보고 반대쪽만 보고 건너다가 차에 치이기가 쉽다. 영국 뿐 아니라 일본과 호주에서도 마찬가지겠다.


런던 도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냥 안전하게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지키는 편이 물론 가장 안전하겠다. 아무 데서나 길을 건너고 싶다,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다,할 때는 좌우 양쪽 모두를 잘 살펴야 한다. 누가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다면 앞 사람 따라 눈치껏 건너시길. 아무튼 누구도 다치지 않아야 하니까.


나는 걷기 좋아해서 걷는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즐비한 런던에서, 이렇게 보행자를 보호해주는 안전한 런던에서, 여기서도 걷지 않으면 또 언제 어디를 걷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어디를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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