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학교 선생님들이 돈 봉투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들이 봉투를 무슨 롤케이크 상자에 넣어서 준다, 음료수 상자 바닥에 깔아서 드린다 했었다. 학기 초면 교육을 위해 당연히 있어야 할 학부모와 선생님의 대화마저 뭔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절차가 되어 버렸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우리 아이만 특별히 챙겨달라"는, 치맛바람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차차 촌지 문화 자체가 퇴출되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작은 선물 좀 하는 게 무슨 문제겠나. 문제는 노골적으로 금전이 오가고, 결국 그 돈의 대가로 모종의 차별과 편애가 제공되는 상황으로 나아가면 부정 청탁이 되고 범죄로 간주될 소지까지 되겠지.
하긴 그 시절 가정환경 조사를 공식적으로 한다면서 니 아부지는 뭐하시노, 집에 차가 있느냐, 등등 아주 사적인 질문을 했던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긴 하다. 선생님들이 가정방문까지 했었으니까.
집안 형편에 따라, 부모의 기여에 따라 선생님들의 대응에 크고 작은 차이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 같기도 하다.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사람은 어쩌면 '공평하게' '공정하게'가 잘 안 되는 동물 아닐까. 그래서 아예 선물이고 뭐고 주고 받지 못하게 한 극단적 조치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런던에 와서 이제 세 학기 째 아이가 학교에 다닌다. 2024년 봄, 여름, 가을 학기. 여기는 선물도 자유롭다. 세 학기 사이에 선생님들 만나면서 선물도 줘봤고, 학부모회에서 공개적 공식적으로 돈을 걷기도 한다.
학교에서 부모를 부르는 일은 매우 잦다. 아직은 매일 등교 하교 때마다 학교 앞까지 아이를 데려다 주고 데려 와야 한다. 학년 초가 되니 선생님들을 학부모들에게 소개하는 행사가 공식적으로 열린다.
담임 선생님 뿐 아니라 각 과목 담당 선생님들과도 인사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스페인어 중국어 프랑스어 선생님이 따로 있다. 과학, 영어, 수학, 음악, 체육, 휴머니티 등 각 과목마다 전담 교사가 있다. 이 분들과 각각 안면을 트고 교육 방향을 큰 틀에서 듣는 자리다.
커피 모닝도 종종 열린다. 말 그대로 아침에 차 한 잔 하면서 선생님과, 또 다른 학부모들과 소셜라이징 하는 행사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싶으면 언제든 요청해서 약속을 잡을 수 있다. 필요하다면 교장과도 사전에 약속을 잡고 면담을 한다.
음악실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도 부모를 초청한다. 어느 운동장을 빌려서 다른 학교와 치르는 운동경기(축구, 피구, 크리켓, 농구 등 다양하게도 한다)에도 학부모를 부른다. 입시철이 되니 상급학교 진학 지도 담당 선생님과 면담을 해야 한다.
급식은 엉망이지만 아무튼 학부모를 초청해서 급식에 대해서 설명하는 날도 있었다. 가을 학기에는 fete,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바자회 같은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도 학부모를 초청한다.
최근엔 무려 black tie 드레스 코드로 학부모 초청 파티가 열렸다. 그밖에도 자녀 교육 관련 각종 교육, 개인 상담, 공연 관람 등 갖가지 이유로 학교에 갈 일이 잦다.
'일 하는 부모는 어쩌라고' 생각이 드시나? 당신은 한국인이다. 이곳 사람들은 업무 시간에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편하게 빠져나오는 것 같다. 하루이틀 휴가를 내는 건 일도 아니다.
암튼 학부모 여럿이 모이는 자리야 문제가 안 된다. 다른 학부모들과 영어로 스몰토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이야기 듣고 오면 되니까.
그런데 우리가 요청한 개별 상담, 혹은 학교에서 불렀더라도 선생님과 단독으로 만나야 할 때는 여러 생각이 드는 것이다. "빈 손으로 가면 좀 그런가?"
이럴 줄 알고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이 있다. 일 할 때도 해외 출장을 나올 때면 남대문에 들르곤 했다. 전통 공예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가가 있는데, 거기 물건이 괜찮다. 비교적 싸고.
내 선택은 주로 자개 제품들이다. 자개 보석함은 여성들을 위해 아주 좋은 선택이다. 자개 필통은 선생님은 물론이고 자기 사무실, 자기 자리 혹은 서재가 멀쩡하게 있는 중년들에게 줘도 좋다. 소소하게는 자개 명함 케이스도 그럴 듯한 선물이다.
잘 만든 자개는 예쁘기는 얼마나 예쁜가. 장인이 조개 껍데기를 자른 조각을 하나하나 나무 상자에 붙이는 과정을 설명하면 외국인들 입이 떡 벌어진다. 그 시간과 노력, 예술성을 이 사람들은 굉장히 높게 본다. 내가 능력만 된다면 이웃인 V&A 뮤지엄에도 한국의 자개장을 기증하고 싶다. 최대한 크고 멋진 걸로.
국립중앙박물관 굿즈는 대감동이다. 접시 세트나 풍경 같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은 물건들은 나도 갖고 싶은 지경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주말이면 런던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온 가족이 나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런 집 포치에 걸라고 풍경을 건네도 좋아했다.
이 학교에 유일한 한국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었다. 이건 일종의 책임감이다. 누구도 지명하지 않은 자가발전 국가대표...우리는 고급스러운 한국 문화를 알리려고 했다. '우리에겐 오래된 전통이 있다', 'K팝의 독창성이나 K드라마의 미장센이 그냥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각 반마다 학부모 대표가 있다. 이 대표들은 종종 모두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러는 것 같다. 학부모회 결의로 돈을 공식적으로 걷은 게 지금까지 두 번이다.
한 번은 학년이 마무리될 때. 1년간 고생한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거다. 자연스럽다. 여름 학기가 끝날 때 50파운드씩 걷었다. 대략 9만 원쯤 되겠다.
선생님들께 드릴 백화점 상품권을 사고 샴페인도 한 병씩 넣어서 드렸다. 학부모 대표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연말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이 사람들한테는 가장 큰 명절 같은 느낌이니까. 또 50파운드씩. 아마 비슷하게 진행되겠지 싶다.
물론 돈은 내지 않아도 된다. 희망자만 내라고 하긴 한다. 하지만 왓츠앱 단체방에 관련 공지가 뜨고, "송금 완료" "확인. 감사!" 메시지가 수시로 오가는데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런 부담 이전에 서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정을 나누는 것 자체는 좋다. 선생님과 학부모가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고. 친한 선생님의 생일 선물을 개인적으로 따로 챙겨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도 아이가 특별히 따르고 좋아하는, 우리 부부도 정말 좋은 선생님이라 생각하는 J와 면담할 때 선물을 따로 하나 챙겼다. 아껴뒀던 예쁜 자개 보석함으로.
한국에선 윗사람에게 바치는 뇌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좋지 않았던 게 도리어 이상했나 싶기도 하다. 한국은 왜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제도로 묶어버렸을까?
관계를 주로 상하로, 지시 받고 따르고, 평가 하고 점수를 받는, 작은 권력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습속이 깨어져 가는 과정일 테다. 언젠가는 우리도 위아래가 아닌 수평으로 바뀌어가겠지. 그러느라 한동안은 이렇게 정도 나누지 못하게 된 거겠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학부모 입장에서는 편하고 깔끔하고 좋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작은 선물 하나에도 큰일 난다고 기겁하는 한국 선생님들이 참...
부정 청탁과 음성적인 특혜라는 거래는 제도로 막아 놓아도 그늘에서 곰팡이처럼 퍼질 수 있다. 나쁜 사람들은 어차피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까.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신뢰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신뢰자본이 바닥을 치고 있는 한국에서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