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도 따뜻하고 안전한 신축 아파트에서 살아보자는 야무진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82 이 마당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더구나 런던은 하루가 다르게 임대료가 오르는 곳이다. 기존 계약을 연장하는 방안이 최선이다.
곧장 집주인 할배 M에게 연락했다. 이 집에 석 달만 더 머물겠다. 기존 계약 그대로 연장하자. 1월에 시작한 아이의 봄 학기는 3월 말에 끝나니까 마지막 정리와 작별인사, 이사 준비와 어쩌면 짧은 유럽 내 여행까지 한다 해도 4월 10~15일 쯤이면 귀국길에 오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기존 계약은 1월 18일까지니까 3개월 연장하면 그쯤 된다.
아일랜드 할배는 얼른 대답하는 대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역제안을 해왔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요지는 4월 말까지로 계약하자. 월세는 3000파운드로 올리겠다였다.
M은 무척이나 선심을 쓰는 체하면서 "너네 가족은 정말 훌륭한 세입자였어. 그래서 너희가 좀더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해. 3000파운드를 받아도 내가 손해가 막심하지만, 그리고 이 월세도 주변 지역 시세를 고려하면 터무니 없지만 내가 통 크게! 해줄게"라는 취지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리고 부동산 업체 끼지 말고 월세는 자기 계좌로 보내달라고 했다. 개인간 계약을 하자고? 월세 올리자는 것만도 내가 부아가 치미는데?
사실 영국의 세입자 보호 시스템이 견고하다. 기존 계약의 경우 월세와 보증금은 집주인 개인이 아니라 부동산 업체 계좌로 입금했다. 집주인 개인의 재정 상태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 돈은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 같다. 이 틀 밖에서 계약을 하자는 건데...그래도 뭐 어떠랴 생각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큰 걱정거리는 이 아일랜드 할배의 재정 상태였다. 모기지를 갚지 못하고 있는지 독촉장 같은 게 수시로 날아왔다. 급기야 '5월에는 이 집을 비워야 할 수 있다'는 최후통첩성 우편물이 온 바도 있다.
집을 팔아서 빚을 털고 싶은지 매도 호가를 내린 것 같고, 일종의 급급매 매물이 된 것인지 집 보러 오겠다는 문의가 크게 늘었다. 뷰잉은 또 얼마나 잦은가. 집을 보여줄 때 세입자가 없어도 된다고,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부동산 업체 직원들은 얘기한다. 집을 치우고 청소할 필요도 없으니 사는 그대로 두고 나가 있으라고.
하지만 우리 가족 성격상 그게 안 된다. 매번 집을 치우고 청소를 하고 조신하게 앉아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꼴을 봐야 하는 것이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집주인이 바뀌어도 물론 기존 임대차 계약 효력이 유지된다고 하니 큰 걱정은 없으나...영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집주인과 매수 희망자가 거래에 동의한다 해도 부동산 전문 변호사가 개입해서 실제 거래가 성사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길게는 1년씩도 걸린다고 한다. 종합하면 아무튼 우리가 더 머물 예정인 석 달 안에 우리의 세입자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이 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 입장은 다시 정리했다.
1. 계약 종료 시점은 4월 말이 아니라 4월 둘째 주까지여야 한다. 우리가 머물지 않는 기간 2주치 세까지 낼 이유가 없다.
2. 월세는 기존대로 2850파운드로 한다.
3. 부동산 업체를 통해서 계약 연장을 하자. 계약서도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
M은 또다시 뭉개며 시간을 끌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거나 이미 합의한 내용을 되돌려서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와중에 나는 홀로 귀국하기 위해 짐을 쌌다.
우리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한 아일랜드 할배는 계약서 초안을 보내왔다. 영어는 꼴도 보기 싫은 이상한 병이 생겨서 계약서 검토 작업도 힘들었...
내가 이미 귀국한 1월 13일에 접수한 계약서를 보니 기간은 4월 12일까지로 되어 있고 월세도 2850파운드 그대로다. 오케이 딜! 했는데.
송금할 계좌를 알려달라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자기 계좌를 알려주는 거다. 하아 이 할아버지가 진짜 장난 치나. 그러고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은행명 계좌번호 sort code 계좌주 이름까지 떡하니 할배 개인 계좌가 적시되어 있다.
결국은 자기 애초 입장대로 개인간 거래 형태 계약서를 만들어서 내민 거다. 더이상 줄다리기 못 하겠다. 이쯤 되니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도장 찍자. 이 할배의 전략에 말린 셈이지만 도리가 없다.
16일에 1만 파운드를 환전해서 내 계좌로 송금. 이날 송금 환율은 무려 1791.76원. 엄청나다. 우리가 런던에 갔던 2023년 12월엔 환율이 1650원이 안 되었다. 1년 사이에도 계속 올랐던 데다 윤내란이 계엄령 난동만 안 부렸어도...(이하 생략)
아무튼 계약에 따라 M 계좌로 8550 파운드 이체. 그랬더니 이 할배는 보증금은 왜 안 보내느냐고 하네? 보증금? 지난 계약에 이미 보증금을 3228파운드 낸 게 있는데 또 내? 그랬는데 보니까 지난 계약은 종료되는 거고 이 계약은 부동산 안 끼고 개인간 하는, 완전히 새로운 계약인 셈이다. 새 계약이니까 새 보증금이 필요하다는 논리. 말이 되는데 안 되는 것 같다.
17일에 다시 340만 원을 환전해서 내 계좌로 송금. 이날 환율은 1792.35원. 한남동 관저 점거 농성하던 윤내란이 잡혀갔는데 환율은 왜 저렇게 버티는가... 영국 계좌에 남아있던 파운드까지 보태서 3228.45파운드 보증금 송금까지 완료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집을 석 달간 더 사용할 수 있는, 계약 갱신 같은 신규 계약 체결 절차를 마쳤다.
기존 계약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전기와 가스 검침을 해서 최신 요금을 납부한 뒤 영수증을 집주인에게 보냈다. 부동산업체에서 보증금을 돌려받기만 하면 된다. 보증금 환급까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런던 속도는 늘 그렇듯 사람 속 터지게 할 게 뻔하니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느날 돈이 들어오면 기뻐하는 편이 낫다.
집 구하기 3차전, 대망의 결론은 허무하게도 원래 살던 집 계약 연장이었다. 쉬운 길을 돌고 돌아 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원래 집에 주저앉았다. 그냥 이 집에서 좀더 지내다 들어가자고 처음부터 생각했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고생들이다. 어찌 되었든 남은 기간, 아내와 딸이 무사히, 즐겁게, 안전하게 잘 지내다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런던 집 구하기 전쟁은 이렇게 끄읕!이지만 이제 세 식구가 지낼 서울 집을 또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