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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집 구하기 3차전, 결말은?

이미지는 내셔널갤러리 고흐 특별전

by 런던 백수

지금 사는 집은 좋지만 나쁘다. 어쩔 수 없이 새 집을 찾기 시작했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64

집 구하기가 시작된 뒤, 우리는 주로 배터시 지역을 살폈다. 런던에 전기를 공급하던 화력발전소를 재개발한 대규모 복합 단지다. 쇼핑몰도 있지만 인근에 새 아파트를 많이 지었고 지금도 개발이 계속되는 중이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첼시. "A stone's throw away"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서울이라면 당인리 발전소 부지를 새로 단장하면 이렇게 될 수 있겠다. https://batterseapowerstation.co.uk/


24시간 컨시어지가 있으니 당연히 안전하다. 최신 건물이니까 물론 안 춥고 안 덥겠지. 아이 학교 스쿨버스 노선도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노력도 필요 없겠다. 통학 시간은 아마 30분 정도 잡으면 넉넉할 거다. 우리가 보기에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


딱 하나 빼고. 물론 임대료. 당연히 비싸다. https://batterseapowerstation.co.uk/property-to-let/ 현재 월세인 2850파운드로는 스튜디오 정도만 가능하다. 원베드룸이 3300파운드 안팎. 투베드룸 이상은 뭐...


하지만 두 여자만 지내야 하는 상황을 감안해 이곳의 집을 열심히 봤다. 하도 드나들고 자주 연락을 하다보니 부동산 직원 R과 제법 친해지는 지경이 됐다. 몇 번 만나서 이런저런 집들을 들여다보고 이메일을 주고 받고 나자, 일이 한결 쉬워졌다. 그래. 물론 인터넷으로, 외국에서도 집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 라포가 형성되고 관계가 쌓이면 수월해지는 법이다.


Move in date: 20/12/2024

Length: 12 months

Break clause: 6 month mutual break clause

Rent: £3,000 per calendar month

Payable: 6 monthly

Furniture: Furnished as seen


월세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물론 원베드룸이다. 그래도 뭐 엄마와 딸 둘이 지낼 거니까. 현재 사는 집보다 월세가 조금 더 올라가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안전이 우선이다. 6개월만 살 작정이지만 호옥시 모르니까 1년 계약을 하되 6개월째에 계약 파기할 수 있게 설정했다. 월세는 6개월 단위로 선불한다.


집주인은 말레이시아인이라고 했던가. 계약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1월 29일에 집주인이 우리의 오퍼를 수락했다.


지긋지긋할 줄로 알았던 세입자 검증 절차도 큰 무리가 없었다. 서울에서 런던 집 계약을 할 때, 우리가 너무 고생을 한 거였나. 일단 이 사회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니 그나마 마음이 많이 흔들리지 않는 덕분이기도 할 테다.


셰어코드https://www.gov.uk/prove-right-to-rent/get-a-share-code-online를 새로 받아서 제출하는 등 귀찮긴 했으나 12월 6일까지 사실상 모든 서류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일단 신원이 확실하고 돈을 선불로 내겠다고 확약만 하면 집 계약도 큰 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 같다. 이제는 할 수 있다!


12월 20일 이사를 앞두고, 우리는 현재 사는 집 주인 M, 그 아일랜드 할배에게 집을 빼겠다고 통보했다. 1월 18일이 계약 종료지만 일찍 나가야겠다. 그 기간 월세를 좀 돌려주면 안 될까? 당신의 배려에 감사한다.


할배를 가타부타 말이 없더니 덜렁 부동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집 키를 반납해야 하며, 이사 나간 뒤에는 전문 청소업체를 불러서 청소를 해야 하는데 300파운드를 내면 지들이 알아서 하겠으며, 전기 가스 수도 요금과 세금은 빠짐없이 정산해야 한다는 둥 극히 사무적인 이메일이었다. 췟.


한숨 돌린 우리는 스웨덴 노르웨이 여행을 떠난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77 스톡홀름 여행을 마치고 노르웨이로 가는 실자라인 크루즈https://www.tallink.com/의 무민 컨셉 선실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12월 14일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좀 돌봐드리고 런던으로 돌아가면 연말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계약 발효 시점을 1월 초로 하면 되겠다 싶었다. 어차피 지금 사는 집 계약 만료는 1월 18일이다. 우리가 일찍 집을 비워준다고 해도 집주인 할배는 그 기간 월세를 환불해줄 의무가 없다. 호의를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계약 기간을 최대한 채우는 편이 낫다. 내 귀국은 1월 12일이기도 하고. R에게 이메일을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런던에서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다. 아파트 건물 수도관이 파열되면서 우리가 들어가려던 집이 침수되었다고 했다. 가구와 마루 바닥을 전체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적어도 1월 말이 되어야 입주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신 건가 아니면 일이 더 꼬이는 건가. 그러잖아도 아버지를 떠나보내느라 정신 없는 통에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그리고 우리 사정도 변했다. 6학년은 마치려던 계획을 바꿔서, 봄학기만 마치고 돌아오는 걸로. 아이의 성장을 위해 4학기면 충분하다.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성장했다. 한 한기동안 친구들과 더 즐겁게 보내고 돌아오는 걸로 하자. 4월에 돌아와서 한국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로 복학하면 되겠다.


어 그러고 보니 배터시의 그 아파트 최소 임대 기간이 6개월이었다. R에게 다시 이메일. "우리는 3개월만 계약했으면 해. 가능할지 집주인에게 물어봐줄래?" R은 금방 회신해왔다. 집주인에게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했다. "미안하지만 최소 계약 기간은 6개월이야. 석 달이라면 서비스드 레지던스나 에어비앤비 같은 거 알아봐야 할 걸?"


런던의 신축 아파트에서 살겠다는, 안전하고 따뜻한 집에서 지내겠다는 야무진 희망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자, 다시 원점이다. 4월까지 지낼 집을 구해야 한다. 그것도 현재 집 계약 만료일인 1월 18일 이전에.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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