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더크라운을 재미 있게 보다가 런던 생활이 떠올랐다. https://www.netflix.com/kr/title/80025678 런던에서 지내면서, 정확히는 캔싱턴에서 1년을 살면서 여러 번 놀랐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대한 기억이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박물관도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 대형 공연장은 남편 이름을 딴 로열알버트홀이다.
건축에서도 붉은 벽돌과 흰색 몰딩, 화려한 장식과 베이 윈도우 등을 특징으로 하는 '빅토리안 양식'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부터 집중 개발된 캔싱턴 첼시에는 빅토리안 양식 건축물이 즐비하다. 3~4층 짜리 적벽돌 테라스드 하우스들이 아주 전형적이다.
여행자들이 많이 들르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이나 세인트판크라스역도 빅토리안 양식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1997년 서거한 다이애나비를 여전히 기억한다는 점이다. 물론 다이애나는 생전에도 단순한 왕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왕실의 틀을 벗어나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웃고, 울고, 손을 맞잡았던 "국민의 왕세자비"였다. 비록 남편 찰스의 외도와 다이애나의 맞바람으로 끝내 이혼하긴 했으나.
다이애나는 왕실의 전통적인 거리감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직접 소통했다. 1987년, AIDS 환자의 손을 맨손으로 잡았다. 당시는 HIV 환자와의 접촉을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그녀의 손길 하나가 편견을 깨뜨렸다.
1997년에는 앙골라에서 맨발로 지뢰밭을 걸었다. 무장 군인도 아니고, 얇은 블라우스 차림의 여성이 전쟁의 잔해 속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면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1997년 8월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래서 큰 충격이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들이 거리로 나와 애도했다. 왕세자 전처의 죽음에 사건 직후 절제된(혹은 냉담한) 반응을 냈던 영국 왕실도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 속에 공식 추모식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후, 영국 곳곳에는 그녀를 기리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특히 어린이들을 아꼈던 다이애나의 생전 뜻을 담아 다이애나의 이름을 딴 어린이병원과 학교가 여러 곳 생겼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다이애나 어워드도 수여한다.
2004년 런던 하이드파크에는 다이애나 기념 분수가 만들어졌다. 생전 다이애나의 성품을 닮은 듯, 바닥을 흐르는 형태로 조성된 분수다. 하늘 높이 솟구치지 않고 사람들을 감싸고 흐른다. 누구나 발을 담그고 물놀이를 할 수 있다. 여름철엔 물 반 사람 반이다.
켄싱턴 궁전 근처에는 다이애나 기념 놀이터가 조성되었다. 해적선을 테마로 한 놀이터는 무료로 개방된다. 매년 100만 명 넘게 방문한다고 한다.
그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도록 다이애나 기념 산책로도 마련되었다. 버킹엄궁과 캔싱턴궁 등을 누비는 이 산책로는 11Km 길이다. 이 사이트에 가면 자세한 지도가 나와 있다. https://www.royalparks.org.uk/diana-princess-wales-memorial-walk
산책로를 걷다 보면 독특한 바닥 표식을 발견할 수 있다. 원형 금속 판 중앙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장미 문양과 화살표가 디자인되어 있다.
2021년에는 두 아들,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 왕자가 함께 켄싱턴 궁전 정원에 다이애나 조각상을 세웠다.
조각상은 다이애나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선큰가든에 만들어졌다. 선큰가든 안으로는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고 둘레로만 걸어볼 수 있다. 뒷모습은 그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지만 정면은 가든 건너 멀리서만 봐야 한다.
다이애나의 표정은 웃음기 없이 단호하다. 한 아이는 다이애나의 손을 잡고 있고 다른 아이들은 따뜻하게 신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각상 받침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고 한다. "These are the units to measure the worth of this woman as a woman regardless of birth. Not what was her station? But had she a heart? How did she play her God-given part?"
선큰가든 자체도 다이애나비에게 헌정되었다. 2017년, 서거 20주년을 맞아 화이트 가든으로 조성했다. 다이애나가 생전에 좋아했던 흰 장미와 백합, 튤립, 수선화 등으로 꾸며졌다. 여름철에 가면 특히 아름답다. 꼭 이곳 뿐 아니라 런던은 여름에 가보시길 권한다.
다이애나비가 결혼 전에 친구들과 지냈던 플랏도 그대로 있다. 60 Coleherne Court, Old Brompton Road
박물관도 아니어서 관광지로 추천할 곳은 아니지만 다이애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종종 찾아가기도 한다. 안에 들어가볼 수는 없다. 건물 퍼스트 플로어 외벽에는 다이애나가 살았던 건물이라는 파란색 금속판 표시가 있다.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런던 여행길에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보는 하루도 괜찮을 것도 같다. 찰스3세와 불륜녀 카밀라가 끝내 결혼까지 해서 왕과 왕비로 공식석상에 등장하곤 하지만 영 좋아뵈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