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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이스와 테이트 사이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by 런던 백수 Feb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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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라기눈이 내린다. 잘게 부서진 쌀알 같은 작은 눈발은 겉옷 모자에 부딪힐 때는 제법 소리도 낸다. 귀여운 무게감. 작은 쌀 조각, 쌀 아기는 싸라기가 되고 싸라기를 닮은 작고 단단한 눈을 본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중 누군가가 싸라기눈이라 했겠지.


동네를 가로지르는 개천 바닥 모래를 거르고 걸러 모은 작고 하찮은 금가루 중 그나마 좀 큰 것들이겠다, 금싸라기는. 온통 모래가 낀 시커먼 손톱 아래 흙투성이 손바닥에 금싸라기를 모아 굴리며 환하게 웃는 가난한 얼굴을 상상한다.


이런 날 외출을 하려면 런던에서 늘 쓰고 다니던 털모자를 쓰고 나왔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왠지 잘 안 쓰게 된다. 사실 기온은 한국이 훨씬 낮아서 모자는 여기서 더 요긴하다. 알면서도 털모자에 손이 잘 안 간다. 머리 모양에 그렇게 신경 쓰는, 외모를 꾸미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왜일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눈길을 거슬러 서점에 간다. 긴 설 연휴를 견뎌내기 위해 뭐라도 읽을거리가 필요하다.


늙은 어머니는 주야장천 9번만 보신다. 2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전국노래자랑(아 진행자는 바뀌었군), 40년 전과도 다르지 않을 설 천하장사 씨름대회, 하여튼 모든 게 고색창연한 아침마당, 인간극장, 심지어 1박2일 이나 일일 연속극, 9시뉴스 따위 프로그램을 엄마와 함께 보며 웃고 먹고 마시고 졸고 욕하고 하다가 어느 순간 너무 지겨워진 탓이다. 뭐라도 읽어야겠다. 이야기 속으로 도망치자.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책방이 있다. 학생들 참고서와 문제집 뿐일 거라던 걱정이 무색하게 큐레이션이 제법 튼실하다.


얼굴은 50대 초반처럼 보이는 서점 주인은 머리칼은 눈 쌓인 슬레이트 지붕 색깔이다. 멋스럽다. 아마 주변에서는 나이 들어보인다고 염색하라고 채근하겠지.


"아, 좋은 소설을 고르셨네요. 이 소설 원작으로 영화도 만들어진 거 아세요?"

내가 골라온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델리아 오언스. 살림)을 계산대에 올리자 서점 주인이 반색한다.


처음 보는 손님인데도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신다. 반갑고도 낯선 친근한 환대다. 물론 나는 영화화되었는지 모른다. 서서 두어 페이지를 읽어보다 그저 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골라 들었을 뿐이다.


"아 영화로도 개봉했군요? 흥행은 괜찮았나요?"

"극장에서 어땠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영화도 아주 재미 있게 봤습니다. 책도 잘 읽힐 겁니다. 읽는 속도가 빠르시다면 오늘 안에 다 읽을 수도 있을 걸요."


음 책을 잘 고르긴 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읽어버리면 곤란한데. 그럼 한 권 더 사야겠다. 연휴는 길다. 중국 작가 류츠신의 SF소설 '삼체' 1권도 함께 결제한다.


"이 정도면 연휴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요?"

"하하 네. 아마 충분할 것 같아요. 혹시 부족하시면 다시 나오세요."


동네에 이런 책방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잘 버텨주시길 빈다. 서울의 대형서점엔 회원 가입도 되어 있어서 책을 살 때마다 적립금이 쌓인다. 아마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면 그만큼 비싸게 사는 셈이겠으나. 가까이에서 이렇게 따뜻하게 소통하며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 길로 동네 커피숍에 앉아 쓰디쓴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속도로 책이 읽힌다. 다음 이야기가 너무너무 궁금하다. 전문 소설가가 아니라 동물행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그것도 노년에 쓴 첫 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가 좋았다.


2018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소설이고 국내에 번역본이 나온 것도 2019년이라 이미 좋은 서평들이 쌓여 있다. 내가 새삼 줄거리를 간추리거나 하는 헛된 노력은 하지 말기로 하자.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네이버 검색


대신 인상적이었던 것만 몇 가지. 평생 동물을 관찰하는 게 업이었던 사람이라서일까. 세부 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선술집 주방을 묘사한 대목을 보자.


카운터 뒤에서는 요리사이자 식당 주인인 짐 보 스위니가 철판에서 굽던 크랩 케이크를 뒤집고 달려가서 버너에 올려둔 크림 옥수수를 휘젓고 튀김기에서 튀겨지는 치킨 다리를 쑤시고 또다시 달려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산더미처럼 음식이 쌓인 접시를 손님들에게 내놓았다. 사람들은 짐 보 스위니가 한 손으로 비스킷 반죽을 섞으며 다른 손으로는 메기 껍질을 벗길 수 있다고 했다. 유명한 특선요리는-피망과 치즈 그리츠를 곁들이고 새우 속을 채워 구운 넙치 요리였다-1년에 불과 몇 번밖에 내놓지 않았지만 광고할 필요도 없었다. 입소문이 빨랐으니까.


글을 잘 쓰기 이전에 관찰과 기록을, 메모를 잘 해야 하는 법이다. 말을 잘 하기 전에 타인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좋은 학자가 모두 좋은 소설가가 된다는 법은 없더라도.


그리고 동물 행동학 연구자답게 인간의 행동도 기저에는 어떤 본능적인 반응이 숨어 있음을 내비친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원초적 욕구에 이끌리는 인간의 모습.


물론 그러면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 유색인종에 대한 폭력, 심지어 선과 악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룬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아주 유려하게.

노스 캐롤라이나의 늪지에 고립되어 있던 카야보다 어쩌면 빌딩 숲 속 우리가 더 외로울지 모른다.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온갖 SNS로 24시간 연결되어 있지만 진짜 소통은 부족해지는 시대니까.

우리는 타자를 환대하고 있는가. 나는 테이트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체이스와 가까운가. 뒤늦게라도 반성하고 카야를 받아들이는 스커퍼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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