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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시를 필사하기

천천히 읽어보기

by 아피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손을 사용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사용한다. 그런데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왼손잡이에 대한 동경이 조금은 있었다. 왼손을 쓰는 사람은 괜히 특별해 보인달까? 그래서 가끔씩 왼손으로 글씨 쓰는 것을 시도했지만 얼마 못 가 전부 그만두곤 했다. 그러다가 학생이 되어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한 자세로 앉아 연필을 잡는 시간이 늘었고 고등학생 때는 아대를 쓰거나 스포츠 테이핑을 감고 생활해야 했을 정도로 손목이 많이 안 좋아졌다. 그래서 그때 아 왼손으로 글씨 쓰는 걸 조금이라도 연습해 둘걸! 하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에게 왼손으로 글씨 쓰는 걸 연습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고 모의고사와 수능과 기말고사까지 다 끝내고 나서는 한동안 글씨를 쓸 일이 잘 없어서 손목이 자연스럽게 치유됐다.


왼손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인데 기말고사를 준비하다가 손목이 다시 아파져서 시험은 하나 남고 남은 시간은 비교적 기니까 왼손으로 쓰면서 공부를 했었다. 코딩을 하는 교양과목 이어서 영어로 썼는데 생각보다 쓰는 게 나쁘지 않아서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시험을 끝내고 나는 시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읽고는 있지만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시를 읽고 필사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마침 획기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왼손글씨를 연마하고 싶었고 시 필사로 시를 읽고 싶으니 앞으로 매일 하루에 한편씩 왼손으로 시를 필사하며 읽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갑자기 추진력이 생긴 나는 그날부터 왼손으로 시를 필사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필사한 시는 릿터에 실린 한 시였는데 비교적 이해가 쉬운 시였다. 천천히 손이 굳는 느낌이 났지만 시를 전부 필사했다. 글씨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천천히 시를 읽으니 시의 내용이 머릿속에 아주 잘 남아있었다. 다음날에도 시를 필사했는데 그날에 느꼈다. 시를 천천히 읽으면서 필사하니까 그전에 내가 읽어 보았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구나! 그동안 내가 시를 너무 빠르게 읽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나는 성격이 급한 만큼 글자도 빨리 읽는 편인데 그래서 시를 음미하지 못하고 훑고만 지나가니 시를 이해하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확실히 필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시를 읽는 게 한결 나아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도 한몫한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시집을 한 권 사서 읽고 있는데 빠르게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하루에 두세 편 정도만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지난번에 읽었던 시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쓰고 싶은 시를 골라 쓰기도 한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도 많이 늘었다. 너무 빠르지는 않지만 처음의 느린 속도를 벗어날 정도로는 속도가 붙었고 읽고 이해할 수 있을만한 글씨를 쓴다.(잘 쓰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라면 빨라진 속도 때문에 시를 읽는 속도가 다시금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항상 천천히 하자~ 하고 마음 먹지만 내 맘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쓰다 보면 속도가 붙게 된다. 샤프보다는 연필로 연습할 것을 권한다는 말에 어릴 때 쓰고 한가득 짱박아놨던 연필도 다시금 되돌아보고 괜히 비싼 연필도 몇 자루 사보고 그랬다. 사실 그런 연필이 필기 실력을 향상해 주는 건 아니지만 괜히 열심히 하려는 기분을 내게 도와준다. (그리고 사실 처음에는 연필보다도 잉크펜을 더 많이 썼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시를 필사하는 것, 특히 왼손으로 시를 필사하는 것은 나에게 시라는 문학 장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냥 필사도 아니고 반대손 필사이기에 더 가능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시도 이해하고 왼손 글씨도 아직 한참 초등학생 같긴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나는 인터넷에 필사를 인증하는 사람들처럼 예쁜 글씨도 아니고 다양한 볼 맛이 있는 인크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내가 직접 필사한 사진을 몇 장 올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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