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잃었다
한 책을 읽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나름 평이 좋아서 사본 책이었는데 정말이지 재미있지가 않았다. 소재는 흥미로운데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달까?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궁금했다. 읽어도 다음장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고 완독 하는 게 숙제처럼 느껴졌다. 서평도 원래 A5 한 페이지 정도는 가볍게 채울 수 있는 편인데 반절 정도를 재미없었다는 말을 빙빙 반복하면서 돌려 채우고 그나마 인상 깊다고 느낀 부분을 필사하는 식으로 자리를 채웠다.
원래라면 이 책을 읽고 어떤 점이 좋았는지 뭘 느꼈는지 써내려 갔겠지만 쓰고 싶은 말이 없다. 책 속에 나타나는 관계성, 인물의 행동, 심리 다 괜찮다. 이해도 간다. 그렇지만 그냥 나에게 재미가 없었다. 나름 기대하며 읽었는데 기대 이하인 건지는 몰라도 책을 읽고 나서 첫 번째 감상이 재미없다였기 때문에 주제가 금방 바뀌었다. 주제는 '재미없는 책'이 되었다.
나에게 글 읽기는 관성 같은 거라 한번 흥미가 떨어지면 다시 글을 읽고 싶은 흥미가 같이 떨어진다. 글을 읽는 흐름이 약간 식었다. 동시에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같이 식어서 이번 주에 예약을 걸어둔 글 외에 다른 글은 쓰지도 올리지도 않았다. 지금도 어떤 식으로 글을 써나가야 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을 써봐야 재미없다는 말만 이래저래 돌려가며 반복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아마도 책을 안 읽게 된 건 비슷한 맥락일 거다. 읽는 게 재미 없어졌거나 재미없는 책을 읽어야 했던 것. 정말이지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어도 누가 읽으라고 하면 읽고 싶어지지가 않는다. 비단 내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 게 꼭 책 읽기가 아니더라도 하기로 마음먹은걸 누군가가 시키면 의욕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우리는 꽤나 자주 책 읽기를 강요당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면 독서기록장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주고서는 검사까지 하니 책을 안 읽을 수도 없다. 매주 독서기록장을 선생님에게 내면 선생님은 우리가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검사하고 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무조건 책을 읽긴 했어야 했는데 강제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행동이 무거워진다. 아... 책 읽어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책 읽기가 재미가 없어진다. 재미가 없어지는 게 반복되니 책을 읽는 행위가 싫어졌다.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고 규모가 커져가면서 책 읽는 권수도 자연히 더 줄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책을 읽고 싶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느 순간부터 뭔가 특별한 걸 추구하는 학교가 되었다. 3년을 평범하게 다녔는데 갑자기 남은 3년은 특별한 학교가 된다니... 그 특벽함을 추구하는 학교에서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은 독서였다. 읽고 싶었는지 읽고 싶지 않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한 달에 한 권씩 단체로, 강제로 책을 읽었다. 기억나는 건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복궁 편 그리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와 손녀의 시골 라이프 이야기. 책에 따라 테마가 잡히고 한 달 동안 그걸 토대로 하는 활동은 재미있었지만 내가 읽을 책을 맘대로 정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루해진 책들을 읽어내는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는 인문학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생활기록부에 쓸 책을 읽게 시켰고 그것도 내가 읽고 싶은 책을 허용해주지는 않았다. 철저히 입시를 위한 주제와 책을 골라서 읽고 그에 맞추어 토론하고 활동해야 했다. 이런... 독서... 재미가 없으니 몰입이 떨어지고 이해가 안 되고.. 감투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 활동을 마무리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책의 결말도 다 안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같이 한 친구에게 물어봤었다. 그 여자가 말하는 진실이 뭐였느냐고.. 이것 외에도 수행평가와 입시를 목적으로 한 재미없는 독서는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읽은 모든 책들이 거의 다 재미가 없었다. 그냥 눈으로 훑고 페이지를 넘기는 정도였다. 말 그대로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니 내 눈은 그것을 훑고 지나가느니라의 태도로 독서했다. 사실상 책을 읽기보다 책 읽고 알려주는 블로그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읽고 싶어서 책을 읽고 나니 책 읽는 게 이전만큼 재미없지는 않아서 잘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재미없는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강요받은 것도 아니니 그냥 순전히 나에게 재미가 없는 책이었겠지... 이렇게 순수하게 재미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좋은 건지 좋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재미가 없었다. 나는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아무리 재미가 없고 시간을 들여 꾸역꾸역 보더라도 끝은 보는 편인데 완독을 하는 과정이 이리도 재미없을 줄은 몰랐다. 독서의 권태가 찾아오는 듯하여 재빠르게 다음 책을 펼쳤는데 치료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계속 재미없다는 얘기만 반복하고 어떤 책인지도 안 알려주니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마음속에 묻어 두려고 한다. 책을 재미있게 본 사람들과 열과 성을 다해 책을 써준 작가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사실 감상이라는 것은 꽤나 개인적인 것이라서 누구나 점수를 주고 평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나만 알고 있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