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생길 때 비로소 확실해지는 감정
내가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던 시기는 대략 7-8살 정도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대략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이었으니까 확실히 저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시기는 맞다. 그전까지 나는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몰랐고 스트레스라는 단어도 잘 몰랐다. 그런데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알고 나서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나는 스트레스받는다 = 짜증 난다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이 이후로 짜증도 늘고 쉽게 예민해지면서 스트레스받는다 라는 말을 자주 썼다. 어린이가 뭔 스트레스를 그리 받았나 싶겠지만 모두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그 감정은 더 확실히 존재하게 되고 나는 그 감정을 더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책은 나에게 무수한 수의 감정을 불어넣어 줬다.
이 책은 테드강연을 보고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신간으로 학교 도서관에 들어와서 공강마다 도서관에 가서 읽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름은 없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 만든 일종의 감정사전인데 감정들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한 번씩 경험해 봤던 감정들이 떠올라서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경험해 보지 않은 감정들은 나중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까 흥미로웠다. 필자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는 Sonder라는 단어인데 이 외에도 다른 흥미로운 단어들이 더 많았다.
Sonder는 요약하자면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다른 사람 들고 각자의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는 의미인데 나는 항상 나를 위주로 생각하다가 테드 강연에서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무언가 오호! 하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정신이 들게 하는 경험을 주었다.
책에 있는 단어들은 저자가 만들어낸 임의의 단어이기 때문에 모두 정식 단어는 아니고 그 단어의 뜻이 한국에서는 이미 퍼져있는 것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funkenzwangsvorstellung (푼켄츠방스포스텔룸)'이라는 단어다. 무슨 말인지 감도 안 잡힐 것 같아 설명을 덧붙이자면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쳐다보며 원초적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상태'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이 감정을 설명할 단어가 존재한다. 바로 '불멍'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국어 단어랑 대조하는 재미도 있었다.
원래 책 읽을 때 엄청난 필기를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 책은 간직하고 싶은 단어가 너무 많아서 도서관에서 무음 카메라로 사진을 엄청 찍었고 책이 약 200장이 좀 넘었던 것 같은데 핸드폰 폴더에 160장 정도가 보관되어 있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봤던 단어들을 적어보려 한다.
Licotic 라이코틱
: 대단히 놀랍다고 생각한 무언가를 친구에게 애탈 만큼 흥분되는 마음으로 소개해주고는 당연히 경탄이 터져 나오길 기다리며 계속해서 친구의 얼굴을 살피지만 그 모든 작품의 결점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깨닫고는 움츠러들 뿐인
Fensiveness 펜시브니스
: 친구가 당신이 집착하는 거세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방어적인 반응
Nyctous 믹터스
: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기쁨을 느끼는 ; 세상을 다 뜯어내서 단순히 검은 상자만 남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직 공연 전인 텅 빈 극장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단어가 너무 많은데 나는 이 단어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중에서도 닉터 스라는 단어는 너무 공감되고 좋아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다. 그리고 모호한 감정일 때 보다 믹터스 상황에서 닉터스를 즐기고 있다고 표현하면 뭔가 재미있어진다. 그만큼 나는 이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다녔지만 당연히 까였다. 읽는 재미가 있으니 흥미가 있다면 꼭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