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실둥실 떠오를 정도로 가볍게 느껴질지라도
'비눗방울 퐁' 이라니... 제목부터 너무 귀엽게 느껴지지 않나? 저 '퐁'이라는 한 글자에 괜스레 마음을 뺏겨 찜목록에 넣어 두었었다. 그러다가 추천사를 읽고 사게 되었다. 이전 책에서 추천글만 보고 샀다가 재미없어서 실망했다 이래저래 말을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러진 않았다. 책을 사서 후회하진 않았다.
소설집의 내용은 대체로 이별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별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고요히 잔잔히 천천히 감정을 다스리는듯한 느낌으로 읽혔다. 다른 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되려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감정에 잠식되지 않지만 공감은 될 정도로 읽혔다.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라는 이야기였다. 이 부분을 읽을 때 굉장히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동명의 노래를 들었었다. 자의로 들은 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들은 거지만 말이다. 전 남자친구에게 남은 사랑을 친구에게 주면서 돈을 받고 서로 윈윈 하자는 의미로 감정을 전이한 여자의 이야기인데 이야기 후반부에 나오는 새로운 남자와의 관계성이 흥미로웠다. 남자도 연애가 끝날 때마다 남은 감정을 전이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를 마치는데 거기서 주인공이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되게 인상 깊었다. 이미 끝난 사이니 감정을 전이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만약 나와 헤어진 이후에 나와의 감정을 치워버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미묘한 느낌일 거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잊히는 건 다른 사람이 잊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문제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다 읽고 나니 그 전날 들었던 그 노래가 다시 듣고 싶어 졌고 다시 듣으면서 한 생각은 혹시 그 사람도 이 책을 읽고 이 노래가 듣고 싶었을까.. 그래서 이 노래를 공유한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혹시 그렇다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걸 느낀다는 게 참 낭만적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약간 신기하게 느껴졌던 점 중에 하나는 레즈비언 소재가 사용되었다는 거다. '보험과 요구르트'에서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레즈비언이 중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것이 다른 동성 로맨스 물과 다르게 느껴졌다. 사실 그런 장르를 잘 접하지 않아서 얼마나 대중화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동성 로맨스물을 이렇게 제대로 접한 건 이 소설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동성애 보다도 보험 아줌마와 요구르트 아줌마 커플의 삶의 팍팍함이 더 인상 깊었다. 공돈을 받았지만 결국 지출한 것은 아끼고 아껴서 지난겨울에 고장 낸 변기를 고치는 것이 전부고, 나란히 아파서 병원신세를 지는 이 커플의 모습이 안쓰럽고 웃기고 그랬다. 연인 관계만 여성과 여성일 뿐이지 일반적인 관계로 생각한다고 해도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소설집의 전체 제목을 담당하고 있는 '비눗방울 퐁'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내가 여자친구 입장이었으면 너무 슬펐을 것 같다. 남는 사람 생각하지 않고 비눗방울이 되는 약을 먹었다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남은 하루하루를 같이 보낸다니... 그러고 나서 어느 순간 퐁! 하고 경쾌하게 터져서 사라진다니... 만약에 그런 약이 있어서 소중한 사람을 금방 떠나보내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사실 나는 가족과 자주 떨어져 있지만 매일같이 가족을 못 본다 해도 그다지 슬퍼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나의 가족은 가족을 못 본다는 사실을 매우 서운해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성향의 차이겠지만 내가 슬프지 않은 건 아마도 다시 볼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막연한 생각과 다르게 다시 볼 수 없어지고 그 사실을 인지한 채로 시간을 계속 보낸다면 나는 떠나갈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함께 있지 못하고 많이 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비눗방울이 되기로 결정한 남자친구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한국문학이 참 좋다는 거다. 누군가에게는 새삼스러운 말 일수도 있지만 나는 사실 한국문학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읽을만한 책이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한국 작가 위주의 문학을 많이 읽으면서 한국문학이 참 좋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내가 좋은 작품들도 많이 읽고 있는 거구나 싶다.
전체적으로 이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서 깔깔 거리며 웃는 건 덜 했지만 그래도 너무 우울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처럼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있는 기분도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퀸크랩을 제외하고는 거의 누워서 책을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앉은 자세보다 중력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읽어서 그렇게 느껴졌나 싶기도 하다. 한동안 책 읽기가 재미없었는데 이제 다시 재미있게 읽을 발판을 마련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