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첫째의 ‘처음’은 또렷한데, 둘째의 ‘처음’은 자꾸만 흐려진다.
둘째의 과거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절친 이름도, 첫 걸음도, 유치원에서의 첫 무대도.
그 아이의 모든 ‘처음’이 희미하다.
큰딸의 반 학년과 친구들, 학교 이야기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둘째의 친구 이름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여러 번 말했을 텐데… 내가 관심이 없었던 걸까? 기억에 없다. 그 사실이 너무 미안하다.
첫째가 네 살 즈음,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그런 시기에도 나는 작은 학원들을 수소문해 요리, 체육, 블록 수업까지 찾아다녔다. 발달에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코로나가 절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기침 한 번에도 눈총을 받던 시기. 그래서였을까? 학원도, 수업도, 친구도, 세상과의 연결도 미뤄두었다.
첫째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했을 땐, 나는 레이더를 풀가동했다. 좋아하는 친구의 가방에 내 번호를 적은 쪽지를 넣기도 했고,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편지를 살짝 숨기듯 보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 노릇도 처음이라 서툴렀던 시절이었다.
이제 둘째는 유치원 2년 차.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절친 이름을 모른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이 학원 저 학원 데리고 다닐 여유도 없다. 첫째의 걸음마 시기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과 달리, 둘째의 모든 ‘처음’은 흐릿하다. 왜일까. 내 사랑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건 아닐까?
첫째의 수면 교육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육아서를 달달 외우며 애썼고, 매일 밤 고민하며 육아일기를 썼다. 그러나 둘째는, 첫째를 돌보느라 분주한 사이 어느새 혼자 잠드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정성을 쏟아부은 건, 첫째였던가.
주변에서는 둘째를 볼 때 내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그 생명체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안할까. 지금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누른다.
“엄마는 누구를 더 좋아해요?”
두 딸의 단골 질문이다. 수백 번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는데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팔이 두 개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른쪽 팔은 늘 큰딸, 왼쪽 팔은 늘 작은딸 차지. 둘 다 안아달라고 하면 작은 아이는 품에, 큰 아이는 등에 업는다. 그렇게라도 마음이 같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둘째는 말한다.
“엄마는 언니만 좋아하잖아요.”
그 말이 그렇게 아프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을 갈라 보여주고 싶을 만큼 똑같이 사랑하는데. 그러나 기억의 불균형이 결국 미안함으로 돌아온다.
엄마라는 새로운 세계를 처음 열어준 아이.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서 더 치열하게 애썼던 첫째와의 시간은 마치 첫사랑 같다.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에 조금은 익숙해진 상태에서 만난 둘째. 조급하게 애쓰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아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존재. 선아, 엄마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사랑은 너무도 또렷하단다. 사랑해, 백천만큼.
엄마의 첫사랑, 이린.
엄마의 끝사랑, 이선.
우린좌선.
(오른쪽은 린, 왼쪽은 선.)
엄마는 백천만큼, 너희를 똑같이 사랑해.
(‘백천’은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라고 여겼던, 우리가 함께 만든 사랑의 단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