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의 탄생을 축하하며
한 아기의 울음소리로,
한 남자는 아빠가 되고
한 여자는 엄마가 되었다.
“키키야, 많이 먹었어? 키키야. 키키야.”
어제 태어난 갓난아기에게 무리한 주문을 해대는 사람, 바로 내 남동생이다.
잠만 자는 신생아의 뜬눈이 보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아기에게 알리고 싶은 듯 ‘키키야’를 반복해서 불러댔다. 눈 한번만 떠 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서울에 오래 살아도 여전히 표준어가 어색한 그는,
표준어 반, 경상도 사투리 반의 이름하여 ‘세미 표준어’를 구사하며,
185cm의 큰 키와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딸아이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 큰 손으로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동생의 서툰 손놀림과 떨리는 목소리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연분만을 시도하던 올케에게 응급 상황이 찾아왔고,
결국 키키는 제왕절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덧으로 그렇게 고생하더니, 낳을 때도 쉽지 않았겠구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
그렇게라도 “나, 지금 여기에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만난 딸아이가 얼마나 더 귀할까.
늦은 결혼 끝에 아이 없이 살겠다며 딩크족으로 지내던 동생에게, 예쁜 천사가 찾아왔다.
건강하고 통통한 딸을 낳아준 올케가 그저 고마웠다.
‘이제 우리 동생도 진짜 가정을 완성해 가겠구나.’
그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자신을 닮은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 벅찬 감동을 동생도 느끼고 있겠지.
매일매일 아이의 사진을 찍으며, 하루하루를 기적처럼 보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엄마는 뱃속에 점처럼 생긴 아기를 느끼는 순간부터 모성애가 자라나고,
아빠는 아이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부성애가 피어난다고 했다.
동생도 그렇겠지.
이제야 ‘아빠’라는 이름이 실감 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곧 ‘딸바보’가 되어가겠지.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곧 알게 되겠지.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남매.
사랑을 느끼는 법도, 표현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동생이 느낄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한 생명을 마주한 부모의 마음에 차오른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부모란, 스스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아이가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 모든 걸 아이가 가르쳐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마흔에 낳은 귀한 외동딸, 키키.
부부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스스로 부모를 찾아온 고마운 생명.
그녀의 탄생이 가져올 변화와 기쁨이
이 젊은 부부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물들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