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기둥남

by 이곰

출근길 지하철역.

북적대는 시간을 피한다고 일찍 나섰지만 지하철 승강장에 줄은 항상 만원이었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고 들어가고, 지하철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모든 일이 일어난다.


지하철에 들어서는데 양쪽 출입구 중앙에 거구의 한 남자가 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는 와중에도 그는 지하철 앞뒤 문의 정확히 중앙에 서 있다.

흔들림 없이.

마치 지하철을 만들 때부터 기둥처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도 기둥남을 피해서 나와야 했고,

지하철을 탈 때도 그를 피해서 들어가야 했다.

기둥남은 덩치도 거대했지만 뿜어내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나를 건드리고 지나가기만 해 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하철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아무리 피하고 피해도 기둥남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살짝 궁금해지기도 했다.

기둥남에게 부딪히면 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서서히 기둥남이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퍽' 그리고 '팅'

부딪혔다기보다는 튕겨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

처음의 무서움과 호기심은 어느새 측은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나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사람들이 위에서 아래로 우르르 내려오는데

그 사이를 굳이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


스크린도어가 닫히는 상황인데

그 사이에 가방을 들이밀다 오도 가도 못한 채

힐난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는 사람.


그리고 기둥남 같은 사람.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왜 저렇게 개념이 없을까.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

저 사람들도 나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겠구나 싶어진다.

마음이 급하고 여유가 없으니 저럴 수도 있겠구나.

짠한 마음이 들곤 한다.


맞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

갱년기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내린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과 타려는 사람이 엉켜 있다.

흐름이 보인다.

내리자마자 승강장 옆 의자에 잠시 서 있는다.


잠깐 기다리다 보면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의 흐름이

물 흐르듯 정리된다.


지하철 문이 닫힌다고 바로 움직이면 곤란하다.

닫히는 지하철 문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과 부딪히면

이보다 더 아플 수 없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돌진하던 사람이 체념한 듯 걸음의 속도를 늦출 때까지

나는 그냥 제자리에 서 있는다.

이 모든 흐름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1분이면 된다.

길지 않은 시간이다.

잠깐 멈춰 서 있기만 하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다.


젊을 때의 나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할 시기였으니까.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어느덧 중년이 되고
여유가 생기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방식이 다르고 기질이 달라

부딪히고 다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이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하철에서 북적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내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함부로 평가할 수도,

쉽게 판단할 수도 없다.


각자의 삶의 짐을 짊어지고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살아내고 있을 뿐이니까.


그저 바란다.

조금 덜 상처받기를.

조금 더 깊은숨을 쉴 수 있기를.

전체 판을 한 번쯤은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를.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면

속이 또 백 번쯤 뒤집어진다.

이 역시 어쩌랴.

나 역시 평범한 인간인 것을.


“그저 너무 힘들지 않길.

눈물은 너무 많이 흘리지 않기를.”


이 말이 지하철의 그 기둥남과

오늘도 일상을 살아내는 이들을 향한 위로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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