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손잡이가 되어줘

by 이곰

첫 번째 이야기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시절, 술을 많이 마셨다.
주에 두세 번은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었다.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항상 무겁게, 거의 만취에 가까울 때까지 마셨다.


그날은 유독 더 많이 마셨다.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휘청거리며 겨우 지하철을 탔다.
빈자리에 앉아 있는데, 묵직한 무언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데.
지하철에서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흐릿하지만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장면.
자리에 거의 대자로 뻗은 채 앉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블랙아웃.


겨우 눈을 떴을 때, 여행용 휴지 하나를 들고 있는 손이 보였다.
그다음 순간, 다시 블랙아웃.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가방만 던져둔 채 잠이 들었나 보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보니 집은 난장판이었다.
가방 속 물건들이 방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때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여행용 휴지 한 통.

이게 뭐지?

불현듯 전날 지하철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눈을 뜨고는 도무지 기억해 낼 수 없던 장면들.

그러다 휴지 한 통을 들고 있던 손이 보였다.
아, 꿈이 아니었구나.


아마도
대자로 뻗어 울고 있던 내가 측은해 보였던 모양이다.
누군가 말없이 휴지 한 통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그 휴지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술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야기

장면은 다시 지하철로 돌아온다.

회식이 끝난 뒤, 밤 열 시쯤이었을 것이다.
하기 싫은 회식을 겨우 마치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체구.
백팩을 메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소녀.
그 옆자리에, 육십 대쯤으로 보이는 술 취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고개를 들이대며 말을 걸고 있었다.
불편했다.
슬금슬금, 그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소녀의 손을 슬쩍 잡더니
손금을 봐준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일 텐데.
저게 무슨 짓인가.

그리고
그 상황을 그대로 견디고 있는 저 아이는 또 무엇인가.


그런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기질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이의 사촌 언니인 척을 했다.

마치 약속해서 만난 사람처럼.

술 취한 남자가 무섭기도 했고,
그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됐지만

어떻게든 지금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내가 횡설수설하며 언니 행세를 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추운 날씨였는데 옷은 얇고 낡아 있었고,
등에 멘 가방도 사정은 비슷해 보였다.


다행히 남자는 더 이상 진상짓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일으켜 세워 내 앞으로 걷게 했다.

아이는 어디에 홀린 사람처럼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나도 집에 가야 했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벤치에 아이를 앉혔다.

집은 어디니.
아까 왜 가만히 있었니.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없는 시간이 길게 흘렀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경찰서에 가자고 말했다.

‘경찰서’라는 말에
아이는 잔뜩 경계하며 나를 바라봤다.

경찰서에는 절대 안 갈 거라고 했다.
경찰서에 가면 자기를 집으로 보낼 거라고.


아이의 마음이 열리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는 말했다.
집에서 학대를 받고 있었다고.
그래서 도망쳐 나온 거라고.

아이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었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절대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믿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해 보였다.


오늘 밤 길에서 자면
아까 만난 그 남자보다
더 위험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 말하자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손을 잡고 가까운 경찰서로 갔다.

상황을 설명하며
절대 집에 보내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찰관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가 조사를 시작했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른 경찰관이 다가와
학대당한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문이 찍히지 않는다고.


나는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절대 집에 보내면 안 된다고.


경찰관은
안전한 거처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 이제 조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아이의 행색을 떠올리니
돈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근처 ATM을 찾아 들어가 돈을 뽑아

봉투에 담았다.


경찰서로 돌아오니
아이는 조사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아이를 데리러 온 사람이 도착했고
나는 다가가 아이 손에 봉투를 쥐여주었다.


아이는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없잖아.
얼마간은 버텨야 하는데.

아이는 고맙다고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많은 감정이 담긴 눈.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 아이를 바라봤다.

오래된 기억이라 흐릿하지만

“잘 지내.”
라고 말하며 아이를 보냈던 것 같다.


마무리

돌이켜보면

내가 무너졌을 때 손잡이가 되어준 것도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손잡이가 되어준 나 역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이란 존재를 믿을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지하철에서 울던 나에게 휴지를 건네던 손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앞을 걸어가던 아이의 뒷모습.

그 장면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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