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상회 ep1

EP 1. 연하 오빠 편지

by PanG

이별 상회


“어서 오세요~ 이별 상회입니다.”

매일같이 듣는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얘기 듣는 나는 누구냐고?

뭐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모르는 존재?

하지만 사람은 아니고…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나는 “이별 상회”다.


Concept

우섭은 이별 상회 사장이다.

미사리에 있던 노부부가 재개발로 인해 카페를 좀 더 안쪽인 팔당 근처로 이전하면서 새로 지은 가게를 인수한 것이다.

우섭은 인수 하자마자 카페를 새로운 컨셉으로 바꿨다. 노부부의 입장에서는 꾸며 놓은 카페의 변화가 싫었겠지만, 젊은 사장 입장에서는 올드한 분위기의 카페로 도저히 이 동네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생존의 선택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노부부는 강원도에서 가져왔다던 카페 대들보 4개는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했다. 결국 그 계약조건을 동의하고서 우섭은 카페를 인수할 수 있었다.


대기업 마케터 출신이던 우섭은 평범한 커피숍으론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가평, 청평의 카페와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생각에 특이한 컨셉을 구상했다.

“이별이었다”.

매일 알콩달콩 예쁜 카페를 찾는 커플 말고 이별에 눈물 뚝뚝 흘리는 독특한 스토리의 테마 카페를 구상한 것이다.


Rule 1

“이별 후 가지고 있던 모든 추억을 상품으로 팔 수 있다.”

이별 상회 한쪽엔 판매대가 있다. 가격은 10원부터 몇 백만 원까지 별별 물건들이 잡다하게 모여있다. 작게는 주고받았던 사랑의 연서부터 시계나 신발, 옷 같은 명품까지 이런 것도 파나 싶을 정도의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이별 상회”에서는 판매 대금의 10~20% 수수료를 받고 물품을 팔아 주는데 받은 수수료는 지정된 곳에 기부를 한다. 수수료율 역시 판매자가 지정한다.

1년 동안 판매되지 않은 상품은 고객에게 회수를 요청 후 미 회수 시 기부한다는 약정을 받고 전시하게 된다. 단, 판매금액의 10%를 매년 입금 시 판매 기간은 연장될 수 있다.


Rule 2

“가격은 본인이 매겨 판매한다.”

가게는 가격을 정하지 않는다. 판매를 원하는 고객은 가격 명찰에 본인이 원하는 금액을 적어 판매한다. 일반적으로 시장가와 비슷한 가격을 써 놓는데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가격표를 붙여 놓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더 재미있는 건 그 가격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사냐고? 그 사람과 헤어진 사람이 왔다가 아픈 기억을 비싼 값에 모셔 가는 것이다. 가게는 구매자와 판매자의 인적사항을 받긴 하지만 절대 서로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EP 1. 연하 오빠 편지


오늘도 나는 손님들이 말하는 얘기를 4개의 대들보로 듣는다. 내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이별 상회”는 평일이나 주말이나 꾸준한 편이다. 평일이라고 사람이 없지 않고 주말이라고 북적거리지 않는데 보통은 SNS에 특이한 카페라고 올라온 글을 읽고 오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물론 이별 후 오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긴 하지만…

“와~ 별거 다 파네~”

“연애편지도 파나 봐. 저거 쓴 사람은 엄청 공들여 썼을 텐데 너무하네..”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저걸 다 내놨겠어… 가격 봐 100만 원이래~”

오는 손님들 대부분 그 편지를 궁금해한다.

백만 원짜리 손편지.

어떤 내용이길래 백만 원이란 가격표를 붙였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무엇 때문에 헤어진 건지 3년 전 편지를 가져온 판매자의 사연이다.


그녀가 처음 가게로 들어왔을 때 모든 손님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만큼 그녀는 화려했고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눈길을 끄는 미모였다. 카운터로 와서 조심스레 물건을 팔고 싶다고 했고 물품이 뭐냐 묻는 우섭의 말에 편지라고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편지를 팔러 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


판매 절차를 설명하려는 우섭에게 내미는 가격표에는 1,000,000원이 적혀 있었다. 가게 입장에서야 손님이 정하는 가격에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속으로는 라이또(또라이) 한 명이 또 왔군 수준이었다.

가격표를 붙인 편지가 판매대에 진열되는 순간 그녀는 펑펑 울었다. 미모에 시선을 끈 그녀가 또 한 번 손님들 시선을 끄는 순간이었다. 연실이라 불리던 그녀는 한참을 펑펑 울더니 일자형으로 길게 늘여진 바텐에 와서 아인슈페너 한잔과 자신의 얘기를 담담하게 꺼냈다.


연실은 소위 말하는 텐프로의 에이스였다. 하루 밤에도 몇 백씩 쓰는 사람들 옆에서 웃음과 술을 팔아 몇 천씩 버는 화류계의 여자였다. 어느 날인가 단골손님이 자기 동생과 놀러 왔다며 곱상하게 생긴 학생? 회사원?을 데리고 왔다. 연실이 보기에는 촌티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돈을 물쓰듯 쓰고 명품 사주며 어떻게든 한번 해보겠다는 별별 인간들을 보다가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보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쟤가 언제 사람 구실 할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날도 그렇게 술자리가 시작됐다.


“얘가 이번에 S대 졸업반인 내 사촌 동생이야 잘 봐줘”

최상호는 사촌동생인 최상진을 연실에게 소개해줬다. 눈만 살짝 마주쳐도 피하는 최상진은 연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흔한 손님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최상호는 중남미 쪽에 한국 중고차를 팔아 꽤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는 무역상으로 가끔 접대하러 가게에 들리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동생을 데리고 온 게 좀 의아하다고 할까?

“잘 생기고 학력도 좋은 동생 있다고 자랑하시는 거예요~호호~ 잘생긴 동생분 안녕~”

연실의 손님맞이에 최상진은 수줍게 웃었고 최상호는 “걔 이번에 차였어. 잘 위로해줘~”라며 데리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에 여친에게 차였다고 몇 백씩 하는 술자리에서 위로주를 사 주다니. 좋은 형님 두셨네요 호호~”

“아… 형…진짜 왜 그래!!!”

“그래 차인 우리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연실이 물었다.

“최상진입니다.” 차인 사람 치고는 묵직한 저음이지만 기죽지 않으려는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키도 키고 나름 훈남 스타일인 게 공부만 하는 답답은 아닌 거 같고 왜 차였데요~?”

연실의 물음에 최상호가 또 먼저 대답한다. “이놈 학교에서 소문난 CC 였는데 여자애가 먼저 취직한 후에 회사 다니더니 뻥 차 버린 거지 뭐 껄껄껄~”

“형!! 진짜 계속 그러면 나 간다!!!” 정말 일어서려는 최상진을 연실이 앉히며

“어머~ 진짜 많이 위로해 드려야겠네~” 폭탄주 한잔을 권했다..

마지못해 앉은 최상진은 과거를 지우려는 듯 벌컥벌컥 마시며 “형, 이제 그만 놀려~~!!” 하고 다시 술을 받았다.

“그놈 참, 울고불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알았다 술이나 마셔라~ 여기 밴드도 좀 부르고 애들도 더 들어오라 해~”

최상호가 연신 밸런타인 30년을 흔들며 재촉을 한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연실은 더블을 뛰며 간간히 들어와서 한잔씩 받아 가지만 옆에 세컨이 자꾸 권해주는 술잔에 최상진은 이미 많이 취한 듯했다.

“이 오빠 오늘 작정했나 봐. 연실 언니 큰일 나겠네~”

“큰일은 무슨 술 취한 사람은 아웃이야” 술 취한 사람을 매일 보면서도 그렇게 질색인 게 취한 사람이다. 연실은 그만큼 취한 사람을 싫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상호는 술값 오백만 원을 계산하고 먼저 간다며 최상진을 맡기고 사라졌다.

“오빠~ 동생 데리고 가야죠~!!”

“난 모르겠고, 오늘은 네가 책임져라~ 난 간다~”

주머니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주며 최상진을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사실 텐프로는 성매매를 하지 않는다. 이 돈 주고 왜 술 먹나 싶을 정도로 비싸지만 돈을 주고 성을 팔지는 않는다. 물론 몸으로 공사 쳐서 단골 만들어 우려먹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텐프로는 엄연히 술만 마시는 곳인 것이다. 그런 곳에 지 동생만 놓고 가는 형이나 인사불성 된 동생이나…

“오빠~12시 넘었어~ 나도 퇴근해야 돼~ 얼른 일어나요~”

집에 가려는 연실은 이 진상 같은 손님이 불편하기만 하다.

“간다. 가. 간다고. 네가 찰 때도 난 조용히 갔다. 으허헝~” 다 큰 총각이 저리 울고 있는 걸 보니 순진한 건지 맹한 건지 모르겠지만 연실에게는 쓸데없는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웨이터 아저씨~ 택시 하나 불러줘요~” 웨이터는 혀를 끌끌 차며 팁도 나오지 않는 손님 택시를 잡아주고 투덜거렸지만 어쩌겠나.

핸드백을 매고 나오는 순간 최상호가 찔러줬던 수표가 보였다.

‘어휴… 진작에 내버려 두고 그냥 갔어야 했는데…’

결국 수표 값은 해야 하니 택시에 같이 타고 삼성동에 빌라로 향했다. 월세가 300이라 세긴 하지만 술 마시며 버는 돈에 이 정도 만족은 하고 살아야지 하며 아끼지 않고 고른 집이다. 집에 누굴 데리고 들어오는 건 싫었지만 호텔 가는 건 매춘부 같아 더 싫었다. 그냥 잠만 재우고 술 깨면 보내는 거다.

어찌어찌 집에 끌고 들어와서 소파에 눕혔다. 씻고 나왔는데 멀쩡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최상진을 보니 저 녀석이 오늘 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이 분 선수네~ 저렇게 멀쩡하면서 아까는 택시에도 못 타고~호호 술은 깼고요? 오빠 몇 살이에요?”

“아까 택시에서 술이 깼는데 창피해서 못 일어났네요.. 죄송해요~ 저 27살입니다.”

“어머~~ 나보다 어리네~ 난 29살이에요~ 가게에선 25살이라고 하지만 호호~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야겠네~”

“가게에서 25살이면 나한테 오빠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웃으며 말하는 바리톤 음색이 나쁘지 않았다.

집에 있는 로열 살루트를 꺼내며 한잔 더 할 거냐고 묻는 연실에게 최상진은 얘기나 들어달라고 했다.


최상진은 일류대학교 졸업반임에도 번번이 대기업 취직에 실패했다. CC였던 여자 친구는 국내 굴지의 통신사에 들어가 벌써 2년 차인데 최상진은 졸업 후 들어갈 데도 없다는 현실이 둘의 사랑을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지난달 최후통첩을 받고, 울며불며 매달리고 취업을 하겠노라고 맹세도 했지만 회사의 세련된 직장인만 보다 직업도 없는 취준생을 바라보는 여자 친구의 냉정함에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연실은 어린 학생 CC의 빤하디 빤한 러브스토리가 우습기도 했지만 본인도 대학시절 만났던 남자 친구를 잠깐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아픈 마음 술로 달래니 좀 나아졌어요~ 오빠아아~~” 일부러 연실은 오빠라고 부르며 농을 걸었다.

“나아지지 않았는데 연실 씨 보니까 기분은 좋네요~” 연실의 나이를 인정하는 건지 연실 씨라고 불러주는 매너가 귀에 감겼다.

“기분이 왜 좋아요?”

“음… 그냥요.. 예뻐서? 근데 연실 씨 정말 예쁜 거 같아요… 연예인처럼..”

텐프로에 미모가 안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손님의 지명이 없다는 건 못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 텐프로에서 상위에 있는 연실은 예쁘다는 얘기를 매일같이 듣지만 실연당한 상처남에게 듣는 예쁘다는 칭찬은 뭔가 새로웠다.

“고맙네요~오빠아~” 연실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연실은 자신 있었다. 진부한 80년대 소설의 접대부와 대학생 같은 고리타분한 조합이 아닌 Z세대의 연하남, 연상녀에 신박한 사랑 조합을 만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기는 취업을 준비해.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할 거야. 만약 자기가 내게 일과 관련한 한마디라도 한다면 우리는 안 본다고 생각하면 돼. 대신 나도 자기가 누굴 만났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쿨하게 놔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우리 연실 마님을 두고 누굴 만나겠어요. 나도 자기 일 믿고 열심히 취준만 할 테니 내가 자리 잡고 우리 결혼하자~”

둘이 사랑을 나눈 후 얼마 안돼 최상진은 연실의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는 고시원에 들어가 취업준비한다고 했고 사촌 형인 최상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저 쑥맥이 텐프로 아가씨를 꼬실 거라고는 1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6개월 후 최상진은 반도체 회사에 들어갔다.

“자기야~ 이제 내가 돈 벌게. 돈 많이 벌게. 좋은 회사, 좋은 직장에 예쁜 마누라까지 내가 자기 만나서 이렇게 복 받았나 봐~”

“회사 가서 여우년들이 꼬리 치는 거나 조심하세요. 아주 걸리기만 해 봐 호호호~”

“아무리 예뻐도 자기만큼 예쁠라고~ 이제 일 그만두고 집에도 인사하고 결혼 준비하자~”

“신입사원이 꿈도 야무지셔~ 누가 자기랑 결혼해 준데? 깔깔깔~” 집에 도움받을 처지가 안 되는 연실은 돈을 많이 모아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최상진의 집에 인사를 가더라도 자기가 모아 놓은 돈이 있으면 위축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최상진 역시 연실의 마음을 알기에 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고, 얼른 자기도 돈을 모아서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에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행복한 1년이 지나갔다.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하지? 내가 어제 자기를 너무 괴롭혔나? 껄껄껄”

“아직 한창 힘쓸 나이에 피곤하다니. 보약 좀 해 먹여야겠네. 부실해 부실해~ 깔깔”

“걱정하지 마. 자기 팔순잔치에도 사랑해 줄 테니 나보다 먼저 가지나 마세요~”

“가는데 순서 없다고요~ 오빠아~” 연실은 최상진을 놀릴 때마다 오빠라고 불렀다.

“그건 그렇고 피곤해서 조만간 병원은 한번 다녀와야겠다~.”

“매일 술 마시는 나보다는 건강하겠지. 얼른 출근이나 하세요~”

그렇게 한 달이나 지났을까… 최상진은 연실에게 물어봤다.

“전에 우리가 정한 거 기억나?” “우리가 정한 게 한 두 개여야지 기억하지~ 호호”

“나 누구 생기면 쿨하게 헤어지기로 한 거…”

“…….….”

연실은 갑작스러운 기억 소환에 당황했다. 이런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온 건지 어제까지만 해도 휴가 얘기를 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는커녕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여자가 생겼다고?” 스타카토를 딱딱 끊어서 차가운 목소리로 연실은 말했다.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아?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거 같아?!!!” 연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응..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 같아.”

“사랑한다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 일 년 반이 넘게 함께 지내온 시간이 사랑하는 거 같다는 애매한 여자 하나로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는 게 말이 돼?!!”

“그러게… 사랑하는 거 같은 여자가… 사랑할 거 같은 여자가 생겼다는 게 참 어이없고 애매하지만 우리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아. 단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지는 건 알아줬으면 해.

“그게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네. 넌 그냥 쓰레기고 개새낀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았네. 뒤통수 맞기 전에 내가 먼저 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확 들어와서 정신을 못 차리겠네. 알겠어. 지금 당장 나가줘. 너랑 말 섞기도, 같은 공간에서 숨쉬기도 싫으니까 당장 꺼져!!!”

연실은 헤어졌다는 생각보다 차였다는 자존심의 상처가 더 컸다. 내가 저를 어떻게 챙겨줬는데.. 웃음 팔며 벌은 돈으로 명품 사 입히고 좋은 거 먹이고, 해외여행에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유람하게 해 줬는데 네가 감히 나한테 이래?

너 그러다 몸 바치고 순정 바친 쌍팔년도 순애보 찍을 거라는 가게 언니들 얘기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내가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서도 아니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3개월 후 연실은 자포자기했다.

몸으로 손님 꼬신다고 욕하며 경멸했던 꽃뱀 짓을, 천하다며 말도 안 섞던 호빠 선수들과 동침을, 진상 부린다며 그렇게 싫어하던 술 꼬장을 부리며 자기를 내려놨다. 편지와 함께 최상호는 그때 나타났다.

“나 외국에 출장 나갔다 왔는데 동생이 편지를 남겼더라. 연락을 몇 번 너한테 했나 보던데 너네 둘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어? 꺠톡도 아니고 얘들이 은근 문명에 뒤떨어지네. 근데… 내 동생 답장은 못 기다리나 보더라..” 최상호는 투박한 군사우편 같은 흰 봉투에 편지를 건네주었다. 연실은 최상진의 전화와 문자, 카톡을 전부 차단해 놨으니 연락할 길이 없었을 거다.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도 않았고…. 하긴 다른 사람 전화 빌려서 할 정도로 융통성이나 있었으면 여자 생겼다고 말하는 쓰레기는 아니었겠지만.


낯익은 글씨다. 연실이라고 쓸 때 “연”자의 동그라미 안에 눈웃음 ^^ 을 넣는 그의 글씨체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생각으로 저 편지를 썼는지 이유도 알고 싶지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보지도 않은 편지를 태우려는데 최상호가 상진이가 뭔가 할 말을 적었을 테니 읽어보라며 태우려는 연실을 말리며 가게를 나갔다.

“오빠 잘나신 동생 뭐라 썼는지 봐야겠네요.. 깔깔깔~” 최 씨 집안에선 우리가 동거한 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당하지 않은 연실의 직업 때문에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고 최상진은 회사 기숙사 생활한 줄 알았을 것이다. 최상호가 편지를 가져왔을 때도 동생이 왜 얘한테 편지를 보냈는지 기이하다는 표정이었으니…


자기야~ 내 욕 많이 하니까 좋아? 나 다른 여자 생겨서 사라지니까 신나?

나 우리 연실이 너무 보고 싶은데 욕먹고 맞을까 봐 가지를 못하네~ 다른 못된 년 만나서 잘 살고 있어서 연실이가 나 욕하고 때릴까 봐 겁이 나서 만나러 가지를 못해 ㅎㅎㅎ

미친놈이네. 연실은 이 미친놈 글을 계속 읽어야 하나 하며 어이가 없었다. 깊게 마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편지를 봤다.

나 자기랑 행복하게 살려고 청약통장도 넣고 야근도 해서 수당도 받고, 현장 수당이 좀 더 많아서 공장 가서 일도 하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코피도 나고 온 몸도 저리고 살도 쭉쭉 빠지고 ㅎㅎㅎ 그래도 우리 둘이 모아서 결혼할 때쯤 되면 조그맣게 전셋집도 하나 구하고 자기 닮은 예쁜 토끼가 나오면 깡충깡충 뛰어놀게 할 만한 집도 있어야 할거 같아서 저축도 많이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몸이 안 따라 주네.

자기가 사준 옷이 이제 많이 커. 비싼 명품인데 너무 아깝다.

처음 사준 시계는 아까워서 차고 다니지도 않고 고이 모셔놨는데 이제는 헐렁해서 모양이 안 나네.

우리 동해 갔다 본 환선굴 시원하니 여름에 한번 더 가자고 했던 계획 세우다가 헤어졌는데… 동굴에서 구를 뻔한 거 기억나? ㅎㅎㅎ 자기 깔깔대고 웃으면서 라섹 부작용이냐고 놀리던 소리가 귀에 생생한데….

…………

나 .....

죽는데… 급성 백혈병인지 골수암인지 … 길어야 1년 빠르면 3개월

티브이고 영화에 뻔질나게 나왔던 그 말도 안 되는 급성 뭐시기가 나한테 온 거야. 웃기지?

나… 살고 싶어. 자기랑 팔순에도 사랑 나누면서 살고 싶어. 근데 이제 그거 못할 거 같아.

나이 먹어 대머리가 돼도 나는 멋지겠지만 치료 때문에 빠진 대머리는 안 멋지다. 우리 연실이한테 멋진 거만 기억하게 해야 돼서 사진은 차마 못 찍겠더라.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는데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목소리만 들려서 서운했지만, 우리 통화한 녹음 소리 들으며 병실에서 버텼어. 같이 살면서도 정말 틈만 나면 쓸데없는 통화를 그렇게 했는지.

나 이렇게 외롭게 있기 싫었어. 나... 자기 손잡고 잠들고 싶었어.

자기가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해.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냐는 원망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해.

그렇게 모질게 다른 사람 생겼다고 말하고 나온 내가 너무 밉고,

다시는 자기 보지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어.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나 죽기 전에 연실이 한번 보는 소원 이루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가 힘이 없어.

우리 만난 일 년 반 동안 다투고 싸움 한번 없던 그 시간 동안

CC가 깨져 자기를 만난 게 오히려 내 인생의 행복이었다는 그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나 가야 할 거 같아. 이 편지 쓰는 게 내가 정신이 들어있는 동안의 마지막이 될 거 같아.

자기가 나한테 오빠라고 불러줄 때 세상에 별도 따다 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내가 먼저 별이 되어 가 있을게;

자기는 빨리 오지 않아도 돼. 다른 별과 함께 와도 돼. 나 그냥 하늘에서 은은하게 지키고 있을게.

사랑해. 우리 은실이 너무 많이 사랑해….


은실은 울었다. 아니 죽고 싶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을… 이렇게 나만 보는 사람을… 세상에 다시없을 내 사랑을…

그 옆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보낸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 받았더라면 이렇게 다시 보지 못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 죽자… 나도 죽자… 나도 이 사람 별 안에 작은 별이 돼서 영원히 함께하자..


최상진의 막음이었는지 은실은 다시 살아났다. 술과 수면제를 미친 듯이 먹고 자살 기도를 했지만 연실을 찾아온 최상진의 부모님께 구함을 받은 것이다. 최상진은 죽음이 다가오자 연실의 집을 알려주고 외로운 사람이니 며느리처럼 딸처럼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잠들었다고 한다.

“너네가 어린 나이에 이렇게 절절한 사랑을 했구나… 상진이는 갔지만 나는 딸을 얻었다고 생각할 테니 언제든지 와서 기대려무나..” 상진의 어머님과 연실은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며 상진의 마음을 생각했다.

“네.. 어머님.. 상진 씨가 보내주셔서 제가 다시 살았다고 생각할게요… 엄마라 불러도 되죠?”

“그럼.. 나도 딸이 있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예쁜 딸이 생겨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당신도 그렇죠?”

최상진의 아버지도 붉어진 눈가에 “당신 딸이 내 딸이지.. 상진이가 남기고 간 예쁜 우리 딸이지.” 하며 결국 눈물을 흘렸다.


가게를 그만둔 연실은 최상진의 부모님 집 근처에 조그마한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다.

이제는 한 식구처럼 된 상진의 부모님이 가게도 같이 봐주시고 음식도 함께 먹으며 가족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연실은 상진에게 못다 한 말을 하고 싶었다. 볼 수 없는 얘기지만 상진에게 무엇인가 할 말을 남겨야 할 것만 같았다.


나쁜 놈 최상진~!!!

좋냐? 나 버리고 가니까 좋냐고~!!!!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연실은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펑펑 울기만 했다.

자기 만나서 결혼하면 이거 저거 막 불러보고 싶었다~ 자기, 여보, 서방, 남편, 신랑, 애기 아빠

근데 이제는 아무도 못 불러… 내가 자기 놀릴 때 불렀던 오빠 소리도 이젠 아무한테도 못해.

당신에게 말했던 그 호칭을 이제는 누구한테도 부를 수 없고, 앞으로 부르고 싶던 이 애칭들이 다시는 못 할거 같아서 나 너무 슬퍼.

자기야.. 내가 미웠어? 나랑 함께 하기 싫었던 거야?

나 자기가 대머리가 되고 쭈그렁 할아버지에 틀니 빼고 있어도 사랑했을 텐데 나 왜 밀어냈어? 당신이 똥오줌을 흘리며 기저귀를 차고 있어도 난 당신을 옆에서 지켰을 텐데 나 왜 안 찾았어?

아니다.. 미안해.. 미안해.. 당신은 나 찾았을 텐데 내가 옆에 없어서 미안해. 당신이 내게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메시지 보낼 때 나 당신 미워하며 못 된 짓만 하고 있었어. 이제는 미안하다 얘기해도 듣지 못할 당신에게 하염없이 울기만 하고 보지도 못할 편지 쓰는 내가 너무 밉고 원망스럽다.

어려서 부모님 이혼하고 같이 살던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신 후, 혼자 살던 내게 자기는 가족이라는 행복을 알려줬어. 내 일을 탓하지 않고, 나를 한 인격으로 당신만의 여인으로, 함께하는 사랑으로 지켜봐 줘서 너무나 행복했어.

그 행복… 영원할 줄 알았던 그 행복, 짧고도 길었던 그 행복한 시간에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감사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자기 엄마, 아빠도 나를 딸처럼 대해 주시는데 두 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와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 막 투정 부려도 괜찮아? 최 씨 집 며느리 아니고 딸이 되는 거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ㅎㅎ


보고 싶은 자기야.. 얼마나 더 불러야 응어리진 맺힘이 풀릴지 모를 내 사랑하는 자기야… 내가 없더라도 하늘의 별이 되어 나를 지켜줄 영원한 사랑아… 자기 옆에 별로 남고 싶은데 아직 시간이 안되나 봐…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자기랑 헤어지고 한 못된 짓은 아버님이랑 어머님 모시면서 갚을 테니까 내가 작은 별이 되어 나타나면 나보다 더 밝은 빛으로 나를 감싸줘~ 그러면 나는 자기 빛에 기대 우리 한별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혼자 외롭고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려~ 그러고 보니 나는 자기 혼자 힘들게만 했구나. 나 자기 옆에 가면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게 할 테니까 그땐 나 밀어내지 마.

사랑해 오빠.


연실은 오빠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연실에게 오빠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최상진이 마지막일 것이다.


써 놨던 편지를 어린아이가 산타에게 보내고 싶지만 어디로 보낼지 모르는 크리스마스 엽서처럼 연실은 품에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누군가 이별 상회를 얘기했고 이제는 놔줘야 할 편지라며 편지를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우섭은 편지 가격이 궁금했다. 어떻게 정한 가격이냐고 묻자…..”핸드백에 보인 백만 원짜리 수표가 우리 시작이었으니까요…” 라며 그녀는 일어났다.


EP1. 연하 오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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