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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연 Jun 27. 2024

비앓이

언제 오시나 그리는 마음



 이제 진짜 여름이다 선언이라도 하는 양 날씨가 부쩍 습해졌다. 계절을 타는 탓인지 느지막이 일어나 정신을 차리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는 요즘, 오늘은 잠결에 땀을 흘리는 기분이 들어 비몽사몽 하다 깨어버렸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해 보니 습도가 물 속이나 다름없다. 벌써 여름이구나. 한 해의 절반이 놓지도 않은 긴장을 비웃듯이 휙 지나가버렸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가버리는지.


 습도와 함께 귀신 같이 '여름앓이'가 시작되었다. 살면서 다른 계절들에 비해 유독 여름에 몸도 마음도 아픈 일이 많았던지라,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여름이면 오시겠거니 하고 이름을 붙인 시기다. 명명한 이유로는 앞으로 찾아올 크고 작은 일들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지기 위함도 있지만, 가능하다면 많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더 챙기기 위함도 있다. 오늘도 그랬다. 잠을 깊이 자지는 못했지만, 낯설고 정신없는 꿈 때문에 혼이 나간 듯 일어난 아침. 침대에 더 녹아있고 싶지만 이러다 기껏 맞춘 생활리듬이 깨지겠다 싶어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본다.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하다가도, 누군가가 깨워주는 아침이 어땠더라 공연히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기분이 땅을 기거나 할 때면 당연하게 그런 것들도 혼자 추슬러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외롭고 억울하게 느껴진다.

 밥을 하는 것도 귀찮고, 소화도 잘되지 않는 것 같아 죽을 사러 가기로 했다. 캡 모자도 눌러쓰고 운동화를 질질 끌며 나오니, 후덥지근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습기 때문에 영 찝찝하다. 오늘은 비가 온다더니 그 예고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 언제 비가 왔더라? 얼마 전 잠깐 보슬비가 흩뿌리고 나서 하루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에 속은 기억만이 있다. 걸음을 멈추고 위를 보니, 하얗게 질린 하늘이 나를 마주한다.


 나는 비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주 어릴 때는 우산도 없이 장대비 속으로 뛰쳐나가 그를 맞기도 했었고,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를 들고 산책을 나간다. 물론 빨래의 꿉꿉한 냄새나 빠지지 않는 습기, 흠뻑 젖어버린 바짓단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면 그 불쾌감에도 지극히 공감을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지나치게 맑은 날이 계속되면 어김없이 비를 기다린다. 메마름의 극점까지 치닫은 기분을 단비가 씻겨 내려가주는 기분이 든달까. 특히나 여름앓이를 하는 때일수록 그 시원함이 간절해지곤 한다. 장마든 소나기든 온다 온다 하면서 안 오는 비를 기다리는 자신을 보면, 예전에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간절했을지를 가늠해 보게 된다.


 이렇듯 사는 내내 계속해서 무언가를 그리며 사는 기분이다. 겨울에는 봄을 그리고, 여름에는 가을을 그리고, 후덥지근하고 맑은 날이 계속되면 비를 그리고, 홀로 눈을 뜨고 잠드는 날이 계속되면 사람을 그린다. 혼자 살아가는 생활의 뒤를 당연스럽게 따라붙는 외로움. 그게 어디에든 갖다 붙일 습관적인 그리움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을 왜 바라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늘 막연한 대상을 기다리고 그린다. 아무리 긴 시간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감정들. 받아들이고 달래며 살아가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의식하게 되는 순간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버거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비에 인내심도 없이 닦달을 하고픈 충동이 불쑥 솟는다. 그리 긁는다고 빨리 오실 것도 아닌데, 이유도 모를 그리움이 넘실대는 건 다 앓이 탓이겠지.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던 손님처럼 찾아오기를, 오셔서 땀에 절은 듯 눅진해진 마음을 씻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 비가 오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툭 떨어질 심술을 애써 달래며, 다른 바람을 속으로 되뇐다. 올해 앓이가 크더라도 소나기처럼 가시기를. 가신 후에 더 단단히 굳어진 나의 세상을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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