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소

단편 소설

by 성운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는 말을
내가 어떻게 거절해


축제를 앞둔 막바지의 5월은 이제 겨우 익숙해졌다 싶은 따사로움이 방심했다간 금방이라도 무더움으로 덮쳐올 듯한 이중적인 날씨였다. 하루를 기대하게 만드는 온화한 햇빛이 무색하게 나는 어둠을 찾아 파고들었다. 밝은 게 싫어서라기보다는 어정쩡한 마음에 빛이 스며들어 자꾸만 선을 넘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애매한 정의를 내린 관계에 명확한 답변을 내줬으면 했다. 아니, 차라리 선을 그어 구분 지어 줬으면 했다.


축제 연습 핑계를 대며 그늘 진 동방에 기타를 짊어지고 올라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가사를 봐야만 해석이 가능한 영어가 흥얼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고, 지갑에 넣고 다니는 닳아 날카로워진 피크는 금방이라도 삐져나올 것 같았다. (그만 버려달라는 듯이 피크는 기타 줄을 긁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곤 했다) 습관처럼 동방을 가는 이유는 그나마 기타를 치고 있으면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관계란 주는 마음의 양이 비슷할 때 비로소 안정감을 주고 그 관계가 확실해지는 법이다. 그녀에게 내가 해온 건 그저 쏟아부어 왔던 마음이 시시한 청춘의 일기처럼, 무색하게 흩어지는 것. 그뿐이었다. 애매한 관계에 지쳤다기보다 불안정한 균형을 맞추는 것조차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는 내가 싫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그와 그녀가 같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게 잘못이었다. 그걸 보고 나의 위치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친구 혹은 지인 중 한 명이었는데 그걸 의미 부여하며 부풀려 해석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회와 잡념을 멈추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도착한 동방의 창문에서 내려다본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동방은 다른 사람들의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옥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분에 올려다보기도 내려다보기도 최적의 장소였다. (가끔은 동방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거나 학교의 색감을 관찰하곤 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바깥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고대하던 계절감을 만끽하듯 다채로웠다. 어쩌면 부러운 시각에 바라봤던 탓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마음엔 빛이 마음껏 들고 있었으니까. 모호한 점 하나 없이 온전히 즐기면 되었으니까. 나랑은 다르게 복잡한 마음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저 내 마음도 모르고(나와 상관없기도 했지만) 해맑은 그들이 부러웠다.

'에휴.. 연습이나 하자'

창 밖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에서 돌아서며 짊어진 기타를 내려놓고, 동방에 찌그러져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공허함에 던진 시선 벽에 듬성듬성 붙어있는 앨범 포스터가 받아주었다. 공방의 적막한 공기에 잠겨있다 무기력하게 꽂혀있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옆에 덩아 처량하게 놓여있는 기타를 왼손에 쥐고 한쪽 이어폰을 뺐다. 공연곡이 담겨있는 플레이리스트로 바꾸고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을 위해 반복재생했던 곡이 3번 정도 돌자 손의 움직임을 멈췄다. 연습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생각이 헛돌자 애꿎은 기타만 열심이구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흘러나오는 노래에도 휴식을 주기 위해(핑계다) 스마트폰 화면을 깨웠다. 깨어난 화면은 기다렸다는 듯 의미 없는 광고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무수히 쌓인 광고 메시지의 부질없음을 확인하다 그녀의 이름이 발견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잘 없었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닌 척하며 다급히 내용을 확인했다.


'오늘도 연습해?'

내 스케줄까지 확인한 적은 정말 처음이라 그녀가 보낸 게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시나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싶었다. 조금 의아하면서도 벅차오르는 마음에 쥐고 있던 피크를 입에 물고 대답을 위해 화면 속 자판을 두드렸다.

'응, 지금 동방이야'

그리곤 답이 없었다. 같은 밴드부라 그냥 동방에 오면 될 것을 왜 물어봤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알 길이 없었다. 연락을 하느라 생긴 적막에 더 냉랭해진 동방 공기를 채우기 위해 다시 기타와 앰프를 연결했다. 본격적인 소리를 내기 위해 앰프가 연결되며 내는 지지직거리는 소음은 싸늘하지만 감미로웠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연습 곡을 틀어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끼익"

낡은 철문이 힘겹게 열리는 소리를 냈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큰 문틈 사이로 밝은 표정의 그녀가 '짠'하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속 한편에 남아있던 그늘을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단 둘이 있는 상황을 조금씩 피하려 애써왔기 때문이다. 보더라도 밴드 활동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리에 섞여 그녀를 봤다. 그러다 둘이 있는 상황이 막상 오니 너무 반갑고 한꺼번에 밀려오는 한낮의 빛이 그늘에도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어리둥절하며 혼란스러운 마음들이 죄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말이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그만큼 완벽했으니까. 침묵을 먼저 깨고 말을 걸어온 것은 그녀였다.

"얼마나 있었어? 나도 좀 연습하다 가려고"

그녀의 특유의 담백하면서 활기찬 억양이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에게 집중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이 파고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한 30분쯤?"

이런저런 말들로 재잘거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해봤자 바보같이 정말 쓸데없는 얘기만 주절거리다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얘기가 더 이어질까 바쁜 척하며 고개를 숙이고 다시 흘러나오는 곡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상황에 시선은 그녀에게로 자꾸 향했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기타를 어루만지는 손이 바빴다.


"너 왜 나 피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타의 날 선 울음을 깨고 들어온 건 그녀의 질문이었다.

"응?"

"너 왜 자꾸 나 피해 다니냐고"

"아냐, 내가 왜 널 피해? 불편해할 것도 없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에는 의심이 한가득 머물러 있었다. 피하려 했던 건 아니고 단순히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였다.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는 괜한 질투와 자각으로 부끄러웠던 마음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 했던 행동들이 나도 모르게 거리를 뒀고 그녀에게 다 티가 났나 보다.

"아니, 저번에 팀플 끝나고 가다가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 해서.. 피하나 했지."

"내가? 언제 그랬지? 그냥 널 못 본 거 같은데?"

"아니야,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갔었어."

그 상황에서 인사를 해주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그녀의 마음과 토라진 표정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을 보자 미안함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옆에 있던 그 사람과는 어떤 일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사람 일은 예측할 수 없는 것투성이고 그렇기에 그때 내가 본 광경은 별 일 아니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너무 섣불리 판단하고 괜히 겁먹어서 관계를 포기하려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때마침 동방에 은은히 비쳐오는 노을빛에 페인트가 벗겨진 벽의 허물을 보듬어줬다. 그녀의 질문에 모든 감정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같이 다녔는지에 대한 대답은 물어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모든 게 해결되었다. 인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이어가는 건 이제 무의미했다.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에 있었던 긴 고뇌를 뒤로하고 극적으로 탈출한 기분이 들었다. 허무하기도 두근거리기도 했다. 나를 바라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닿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가까이, 또렷하게 눈앞에 서있었다.

"연습 다 했어? 끝났으면 맛있는 거 먹을래?"

그 모습을 보며 그녀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음을, 좋아하는 그 감정이 진심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 질문의 답은 그녀의 끄덕임으로 이어졌다. 창고 깊숙이 숨겨두었던 마음을 찾아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새것처럼 말끔한 모습을 꺼내 갈아 끼웠다. 정리가 필요한 건 그저 내 마음뿐이었다. 악기와 앰프, 케이블의 제 자리를 찾아주고 동방문을 닫으며 새롭게 마주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어느 때보다 상쾌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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