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지만, 한없이 끌어안고 있던 널 놔야 해
알게 모르게 특별하고 싶었나 보다. 기억에 남아 떠오르는 사람이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을 건데 내가 단단히 착각해서, 순간의 감정에 미끄러져 혼자 애틋하게 세상을 살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친절과 호의는 사회를 살아가는데 나무와 공기 같은 기본적인 순환 관계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파도 같은 찬란한 그녀의 미소에 섣불리 잘못 올라탄 내 탓이었다. 자주 붙어 다니며 친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하게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달빛에 꿈꿨던 산책과 순간의 달콤함은 며칠 뒤 그녀가 새로운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모든 생각이 뒤틀리게 되었다. 친절하고 처음 보는 사람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다는, 어떤 식으로 만나고 알게 됐더라도 누가 봐도 어른스러운 그런 사람이 더 그녀에게 맞는 사람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별 일도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냥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마주 보고 웃고 있는 그 상대가 남자이기에 그랬던 것 같다. 질투. 그보다 정확하고 간단하게 설명하기 좋은 단어는 없을 거다.
사실 그녀와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제법 친해진) 사이였으니 우스운 일이다. 바보같이 바라만 봤기 때문에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는. 그게 다이다.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다가갔지만 전혀 티는 안 났을 거다.
티를 냈다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라든가 '친구로 지내고 싶어'같은 말을 듣으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그냥 더 멀어지기 싫어서 햇빛이 따사롭게 들어오게 열어놓은 이 간격을 유지하는 건 뿐이다. 용기 없는 겁쟁이였으니까.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이 그대로 그곳에, 그 사람의 옆에 머물러 있는 게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하지만 희미해지는 마음의 욕심 때문에 더 머뭇거리게 됐다. 오랜 마음은 무뎌지기 마련이지만 오래 익을수록 맛은 더 드는 법이고 무딘 날은 오히려 베이기 쉽다. 곁에서 지켜보는 시간 동안 마음이 영글었던 탓도 있다. 수확 시기를 잊은 무른 마음에 꽤 다정히 지나가는 그녀와 그를 보며 무너져 내렸다. 어떤 사이인지 어떻게 같이 가는지를 알 방법은 없었음에도. 화끈했던 질투심은 그녀가 그저 사람 대 사람이 베푸는 친절로 나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따끔함으로 나를 뚫고 지나갔다.
그녀를 대하는 내 방식이 해답일진 몰라도 정답은 아니었기에 오답이었다. 무엇이든 티를 내야 하는 법이고 말해야 아는 법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안다. 성급하고 가벼운 마음도 아니고 공허함에 채운 보상 같은 심리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더 티를 내지 못했다. 아니면 은근히 티가 났는데도 애써 아닌 척 조심스러워했는지 모른다. 그게 무슨 이유였는지 잘 모르겠다.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인데 멀어질까 봐 혹은 친구 이상이고 싶은데 그건 부담스러울까 봐. 만날 마음이 전혀 없는데 혼자 간직해 온 마음이 안쓰러우니까. 대충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조심했을 것이고. 특히나 스스로에 대한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일이라면 더욱. 사실 배려한다고 아끼는 마음이 상대방에겐 더 헷갈리게 하고 오히려 배려가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어색해지고 서먹해지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잘 들어맞는 듯했다.
가까워지기 위해 조금씩 머금었던 그 마음은 둑이 터진 듯 순식간에 흘러내려 힘없이 쓸리는 흙처럼 멀어져 갔다. 내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칠흑 같은 관계의 색은 어느 한순간도 뚜렷한 적이 없었지만, 끝에 보이는 희미한 빛만 바라보니 밝다고 착각한 게 틀림없다. 놓치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빛이기에 무작정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면서 내 감정은 단순히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했다.
그렇게 찾아온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난감함은 어떤 마음일지 모를 혼란 속에 그녀와 관계를 조심스럽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혼자 아픈 게 나은 사람이었다. 말과 글에는 힘이 있어 전하는 것에 조심스러웠기에. 그렇다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해를 끼치는 건 아니었지만 알지도 못할 마음 때문에 가장 솔직해지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가는 게 혼란스러웠다. 정작 이도 저도 못하는 바보 같은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니까.
그래서 그냥 좀 멀어지면 마음도 깊어지지 않겠지 생각했다. 피하진 않았지만 애써 다가가는 걸 조심했다. 어느 때와 같이 행동했지만,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서성거리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먼저 연락이 오는 날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해 맹렬히 타오르던 마음에 새로운 장작이 필요했다. 그녀가 좋지만, 전보다 조심스러웠고 그냥 정말 친구겠거니 생각하려 애썼다.
그렇게 애잔한 나의 5월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