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왔던 세상이 너로 인해 뒤집어져
그렇게 그녀와 자연스럽게 친구로 지내며 4월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그녀와 엄청나게 관계의 큰 발전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크게 힘들거나 괴롭거나 하진 않았다. 적당히 연락하며 친하게 지냈고, 마음이 서서히 물들어 갔지만 범람하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조심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별거 아닌 일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반가워해 줬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진 않았다) 귀찮을 법도 한데 오히려 반겨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최근 연락한 이유를 대자면 수업에 관련되거나, 밴드부 일, 점심이 다였다. 사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녀가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었지만, 마땅히 연락할 자연스러운 핑곗거리가 그것밖에 없었다.
종종 저녁 6시에 그녀가 하는 근로장학생이 끝나고 나면 같이 밥 먹을 때가 있었다. 집까지 가서 먹기엔 배가 너무 고프다나. 그녀가 사는 곳은 멀지만 가까워서 표기상으론 같은 지역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돌아가는 곳이라 꽤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가끔씩 그녀와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기 시작한 건 동방에서 늦게까지 연습하고 있던 와중에 그녀가 찾아오면서였다. 느닷없이 같이 저녁 먹을 사람 있냐면서. 마침 저녁때이기도 했고 무엇을 먹을지는 매번 고민이었기에 고민을 덜어주는 기회를 마다할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가끔씩 연락하는 이유에 저녁 먹을 생각 있는지 묻는 것도 추가하면서 나름의 연락할 계기가 생겨서 좋았다. 그냥 별일 없이 여럿이 혹은 둘이 저녁만 먹고 헤어지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벅찬 심경이었다.
흔한 저녁 중 그날은 아침부터 포근하더니 저녁이 되어도 하늘은 맑고 청량했으며 방 안에만 있기엔 두고두고 후회했을 날씨였다. 바르게 놓인 이불이 낯설었기 때문인지 저녁에 나가고 싶은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오늘은 배 안 고파?'
라는 텍스트와 배고파 죽는 이모티콘을 곁들여 문자를 보냈다.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완전!'
그녀의 이런 반응이 알 수 없는 인생에 미소를 짓게 했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끝나면 말해. 밥이나 먹자.'
그녀는 그 답으로 신나서 달려가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모티콘의 생김새라기보단 그녀의 반응과 생각이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이 또 그녀를 좋게 만들었다.
외출준비를 하는 과정은 겨울 제주도에서 막 따온 귤을 까먹은 듯이 신선하고 상쾌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갈 때는 더 했다. 평소엔 그렇게 나가는 게 귀찮아 집에 있기를 좋아하면서 신기한 일이다. 수백 번의 고민 끝에 걸쳐 입은 재킷과 청바지로 외출 준비를 마무리하고 방을 나섰다. 기숙사의 차가운 그림자를 벗어나자 기대했던 포근하지만, 선선한 날씨가 반겨줬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할 일을 다한 벚나무가 푸르름을 내뿜고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져 싫었지만, 지금은 그게 대수가 아니었다. 도서관 앞에 자리한 나름의 광장에서는 분수가 나오고 있었고 날씨와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광장 벤치에 앉아 하늘과 땅을 번갈아가며 구름과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다 보니 (도서관에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었지만 일하는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 자리가 따사로워 아늑했다) 금방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오래 기다렸어?"
"아냐, 나도 방금 전에 왔어."
언제나처럼 담백하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란히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날은 유난히 같은 곳을 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안정감과 다른 것을 떠올리는 신비로움이 섞여 그 자체를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볼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의 초록은 분홍의 설렘을 뺏어갔지만 싱그러움을 주는 간절함이 있다. 초록으로 가득 찬 거리는 어떤 얘기를 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길을 나란히 걷는 순간을 쓸어내린 마음은 바람에 실려 다시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써 꾸미는 부담이 없는 적당한 포인트로 눈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도서관에서 정문까지 걷는 시간은 그저 봄이었다. 크게 특별한 주제를 찾지 않아도,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할 뿐인데 톡톡 튀는 꼬시래기 같은 식감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시계가 없었다면 아주 짧은 시간 그녀와 붙어있었다고 느꼈을 거다.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금방 지나갔다.
저녁을 먹고 이대로 보내는 게 아쉬운 마음에 지하철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녀도 싫진 않았는지 딱히 거절하진 않았다. 걸으며 최근 개봉한 영화에 대한 해석을 쉴 틈 없이 논했다. 지하철 개찰구가 가까워질수록 괜히 천천히 걷기도 머뭇거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그렇게 솔직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녀가 제안했다.
"다음 지하철역까지 좀 걸을래?"
"그럴까?"
다음 지하철역까진 30분 정도 걸리니 30분은 벌은 셈이었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으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공존하는 길은 그녀와 조용하면서 편안한 대화를 이어가게 해 줬다. 이 모든 순간이 분에 넘치게 행복감을 줬기에 그 이상을 욕심내진 않았다. 다음 지하철역까지 재잘거림은 끝나지 않았고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개찰구를 통과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해 줬고, 조금 전까지 있던 그녀의 흔적이 사라지자 공허함이 몰려왔다. 금방 지나간 산책은 기억으로 이어졌고, 기억은 추억이 되어 달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