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단편소설

by 성운
널 바라보고만 있어도, 나도 모르게 미소를


밴드부에 합격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생각만큼 그녀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그녀와 다른 악기 세션이어서 연습 시간이 달랐고, 무엇보다 그녀가 여기저기 바빴기에 동방에서 긴 시간 대화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와 친해진 건 자주 가지 않던 건물에 우연히 들어간 덕분이었다. 그곳은 세 개의 강의동과 이어져 있었고 프린트 실이 존재해 항상 붐비고 복잡한 곳이라 신도림으로 불리었다. 굳이 그런 혼돈으로 향한 것은 우연히 프린트 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안녕. 어디 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표지판처럼 솟아있는 나를 발견한 그녀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놀랐지만 (그녀가 마냥 작은 키는 아니었기에 거의 눈앞에 서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안녕? 프린트하고 크게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어서.. 동방이나 갈까 하고."
그녀는 끄덕이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
주로 점심은 그나마 대학교에서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친구들과 먹었기에 먹었을 리가 없다.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했을 거긴 했다) 그날 잡혀있는 수업은 다 끝났던 터라 동방으로 향하던 길이었기에 마침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아직. 먹어야지 이제?"
"그럼 같이 먹자. 수요일은 수업 겹치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나 혼자서 먹었거든."
그녀는 얼굴에 고민과 결심을 담아 제안했다.
"그래."
그녀가 먼저 같이 하자고 한 적은 처음이라 놀랐지만, 기쁜 마음이 더 컸다.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빠르게 승낙했다.

다음 수업으로 시간이 많지 않았던 그녀의 스케줄 때문에 학식을 먹긴 했지만, 그녀에 대해 일상적이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을 하고 있었고, 예전부터 취미로 베이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악기를 접하며 다루는 악기의 범위를 넓혀왔고, 무엇보다 밴드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는 게 얼마나 호감이 생기고 끌리게 만드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짧은 점심시간이었지만, 비슷한 취향을 얘기하며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기엔 충분했다. 어느 순간보다 편안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자주 그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수요일에는 괜찮으면 나랑 같이 밥 먹을래?"
놀랍게도 이건 내 입으로 한 말이다. 그렇게 계획적이면서 즉흥적으로 그녀와 자주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종종 이어진 만남은 연락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연락은 대부분 밥 먹자는 얘기로 시작했다. 연락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녀는 거절하거나 피하는 일은 없었다. 뜬금없이 아무 얘기로 연락하고 싶었지만 나는 적당히 맺고 끊음을 아는 사람이었고, 겨우 얻은 기회를 어리석게 섣부른 행동으로 놓치진 않는 현명함도 있었다. 아마 그녀한테는 말이 잘 통하는 밥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욕심은 나지만 그래도 그냥 친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사람 정도가 되면 만족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녀와 새로운 진전이 된 계기는 기숙사에서 친해진 준재 덕분이었다.(개강총회에 데려가 준 그 친구이다) 준재는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학생회에 들어갔고, 기존에도 넓었던 인맥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 때문인지 모르는 일이 없을 정도로 모든 소식을 알고 있었고 어딜가나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준재는 학기 초부터 진경과 연애를 하고 있었고, 진경은 그녀와 제일 가까운 친구였다. 이런 복잡하지만 단순한 관계의 조합 덕분에 그녀와 진경, 준재 조합의 셋이 같이 다니는 모임에 가끔 들어갈 수 있었고(같이 밥 먹고 카페 가거나 휴게실에 모여서 얘기하는 게 다였긴 하다) 본격적으로 친해진 사건은 준재와 점심 약속에 그녀와 진경이 오면서였다.

"오늘 수업 하나 때문에 왔는데 공강 돼서 너무 좋다."
식당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으며 그녀가 얘기했다. 완연한 봄처럼 그녀는 화창해 보였다.
"그럼 오늘은 그냥 집에 가면 되겠네?"
모처럼 바빠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녀가 집에 간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녀도 오늘은 여유롭게 쉬는 날이었고, 좋은 날씨를 이렇게 허비하는 게 아쉬웠는지 오늘 다 같이 놀자는 얘기가 오갔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했지만 이런 갑작스러움은 언제든 환영이다. 그들과 함께 학교 근처의 포켓볼장, 오락실을 가서 놀았다. 내기로 편을 나눠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은 편이 되었고, 내기에 진심으로 임하는 그녀와 우연히 스칠 때마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데도 떨렸다. 그런 탓인지 내기는 아슬아슬하게 졌고, 저녁값을 내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그녀와 나, 진경, 준재 이렇게 넷은 자주 붙어 다니게 되었다. 내가 갑자기 그들 사이에 들어갔음에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넷이 아니면 셋, 아니면 둘. 혼자 다니는 일은 잘 없었다. 자주 보는 만큼 빨리 친해졌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재밌었다. 그 덕에 그녀와 아무 일도 아닌 걸로 연락하면서 지냈고, 그녀의 강의시간표나 동선을 여기저기서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자주 붙어 다니다 보면 종종 사귀는 거 아니냐는 기분 좋은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친구라는 범주를 대며 넘어갔다. 한편으로 친구라 부를 정도로 가까워지고 친해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가까워졌지만 쉽게 판단하지 않고 조심히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생각이 깊고 예의가 바르며 똑똑한 사람이었고, 공과 사 구분이 확실해 차갑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알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게 로스팅하는 커피처럼 은은하지만 진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볼 때면 더 가까워지고 싶다가도 친구라는 선을 넘을까 조마조마했다. 결이 맞는 사람이라는 게 빠져드는 건 위험할 정도로 순식간이었고 같이 애써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존재는 점점 마음속에 뿌리내렸고, 옆에 있는 순간들이 지속됐으면 했다. 그저 오래 보고 계속 간직하고 싶었다. 보통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이유를 찾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 사람의 존재가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 사람이기에 괜찮고 좋았다. 친구로 만났지만, 자꾸 친구가 아닌 마음이 자라났다. 신경이 쓰이고 챙겨주고 싶은 순간이 늘어났다. 처음 봤을 땐 그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점점 다른 방향으로 진해졌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진 생각하는 거 같진 않았다. 시답잖은 연락을 해도 잘 받아주었고, 놀자고 하면서 자주 만나고 둘만 보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인류애적인 호감으로도 충분히 그런 것들에 거리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건 고마웠지만, 친구 이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 탓에 내가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면 멀어지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고 다가가는 게 그녀에겐 부담이거나 마냥 좋은 게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웠고 한 발짝만 더 다가갔다간 너무 멀어질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조심하긴 했지만, 불쑥불쑥 나오는 순간이어도 티는 크게 나지 않았다. 흔히 좋아하는 마음은 티를 내야 시작이 된다고들 하는데 내가 한 건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까. 그저 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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