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단편 소설

by 성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그녀와 함께한 어제의 저녁은 친했던 (소위 친구 사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주 전의 그 상태로 돌아간 듯했다. 꽉 막힌 정체구간을 벗어난 고속도로처럼 답답했던 관계의 혈이 뚫린 듯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괜찮아지고 편해진 느낌이었다. 어제저녁동안 가볍게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로 산책도 하고 꽤 웃음이 넘치는 그런 시간을 보낸 덕분이지 않을까. 산책동안 거리는 밤을 보내기 아쉬운 청춘들이 거닐고 있었고 그들을 반기는 수많은 가게가 각자의 이름을 뽐내며 비춰주고 있었다. 걷는 동안 그녀와의 대화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부담 없이 꺼내도 대화가 통했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강박관념 없이 대화하게 해 주었다. 심지어 말없이 밤의 포근한 날씨를 향한 감탄사만 내뱉는 이야기가 휴식하는 순간에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빛나는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향했던 허약해진 마음은 그녀가 비추는 온기에 기운을 차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해 오래 있고 싶었지만, 다음날이 축제를 앞둔 리허설이나 다름없는 합주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비교적 일찍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눈을 뜨면서 오늘은 더 이상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으로 가득했다. 그 덕분인지 지루한 교수님의 교양 수업 중에도 남다른 집중을 보였고, 시간도 신기하리만큼 금방 지나갔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져서였는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내가 아닌 느낌이었다. 축제를 앞두고 오후부터 시작하는 합주 리허설이 있어 떨려서였을지도 모른다며 오늘 하루의 느낌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공연곡을 많이 맡아서, 보는 사람이 많아서, 긴장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 때문이었다. 괜히 더 잘 보이고 싶었고,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아니었고, 불편해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는 사이로, 원점으로 돌아간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한겨울, 식을 걸 염려해 품속에 넣고 온 붕어빵처럼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품어온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은 그 마음이 참을성을 잃었는지 울타리를 깨고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였다. 그저 홀가분하게 세상에 풀어놓을 결심이 들었을 뿐이라 들떠서 그랬을 거다. 이 마음이라는 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다 보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으니 이제 놓아줄 때도 됐다.


밖의 날씨는 마음을 제외한 시선에 잡히는 풍경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고, 봄인지 여름인지 계절감을 잊게 만드는 따사로움과 따가움을 오가는 햇빛도 준비되어 있었다. 차가운 건물이 가득했던 거리도 축제의 설렘에 물들어 모처럼 온화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떨림을 달래주려는 온화함도 잠시, 갑자기 찾아온 따뜻함이 낯설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동방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면서도 어제 마음을 녹여주었던 그녀를 순간순간마다 떠올렸다. 집요하게 묻지도 집착하지도 않았고, 구차한 설명과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던, 마주 앉아 다른 곳을 바라보아도 결국 같은 얘기를 나누던 이해하기 힘들지만 궁금하고 알아가고 싶은 그녀를.


걸음을 가로막는 계단을 맞이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노을로 물들어 마음의 방생을 부추기는 듯했다. '열정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는 도전정신 가득한 명언이 저절로 생각나 누가 말했는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답은 찾지 못했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내 상황에 너무 잘 들어맞았음은 틀림없었다. 뭐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오히려 후련하다는 건 크게 동감하는 바이니까. 결심을 방해하는 괜한 생각을 없애려 숨 쉬듯 꽂은 이어폰에서 나온 노래가 굳은살 박인 손끝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언제나처럼 기타 리프를 손으로 흥얼거리며 동방을 향한 긴 계단을 올랐다. 화창한 날씨에도 교정에는 북적거림 하나 없이 잔잔했고 고요했다. 굳이 이렇게 좋은 날씨를 두고 학교에 머무를 이유는 없으니까. 차라리 그게 좋았다. 사람이 없다는 건 눈치 보지 않고 시끄럽게 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누리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작 운동을 좀 해둘걸.'

계단을 오르며 헐떡이다 보니 낡아가는 껍데기가 야속하기만 했다. 히말라야 같던 계단 등반을 마치고 도착한 동방 입구가 세상 반가웠다. 크게 숨을 내뱉고 곰팡이 핀 벽과 다 떨어져 가는 공연 포스터를 보며 세월의 선사하는 낡음에 동질감을 느꼈다.

동방은 학교 건물 옥상에 자리 잡고 있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쉽게 올 수 없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간섭이 없는 게 오히려 섭섭할 정도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이곳이 쓸쓸하다고들 했지만 한적해서 오히려 좋기만 했다. 찬기가 도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동방에 들어가기 위해 버려 놓은 피아노 이빨 틈새에 숨겨둔 열쇠를 찾으려 더듬거렸다. 작고 반짝이는 녀석을 손에 넣고 문고리를 돌렸지만, 힘없이 헛돌았고 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할 일을 잃은 열쇠를 무기력하게 꽂아두고 동방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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