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한국을 떠나 호주에 사는 이유

2016년 9월 28일

by Ding 맬번니언

행복이와 처음으로 한국에 가고 있다. 한국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행복이를 소개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잠든 행복이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2006년 2월 21일, 호주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나며 다시는 떠올려 뒤돌아보지 않겠다 결심했고, 지난 10년 동안 잊었다고 자신했던 일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다시 떠오른다.


나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서 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시절, 내 주변은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아빠가 하시던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났고, 하루아침에 아빠가 감옥에 수감되시면서 남은 가족들은 급하게 짐을 싸 살던 집을 나와야 했다. 도망쳐 도착한 집은 한겨울에 난방조차 되지 않아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릴 만큼 추웠고 우리 가족은 외투를 입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며 그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런 시간을 함께 버텼기에 다른 어떤 가족보다 끈끈한 정이 있었고 서로 의지하며 정말 아등바등 살아갔다.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 앉은 입장이 되니 대학 진학이나 꿈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실업계로 가서 오로지 빨리 취업해 돈을 벌어야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하지만 실업계로 진학하겠다는 말에 엄마는 반대하시며 인문계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은 이 지경에 놓였어도 훗날 우리 마음에 상처로 남을 그런 결정, 허락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낮이며 밤이며 온갖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먹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엄마의 주장에 난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허름한 집, 낡은 옷,그리고

교도소에 면회 가야 하는 아버지,

꿈을 꾸는 것도 미안해해야 하는 16살,



내 겨울은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고 가슴이 베어지는 것 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가끔... 우리는 교도소에가서 아빠 면회를 하였다. 누나들과 엄마는 아빠를 볼 때마다 울었고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마치 눈물샘이 없어져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고요한 풍경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갑자기 변해버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가 미웠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당시 많았던 인신매매 기사를 볼 때마다 늦게까지 일하는 엄마와 누나들 걱정까지 해야 했던 상황은 고작 십대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것이었다.

그때 내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진이었다. 진이, 민식, 나 이렇게 세 명은 늘 같이 어울려 다녔고 나는 어느새 진이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진이는 잘생긴 얼굴에 운동을 오래 해서 몸도 좋았던 누가 봐도 멋진 남자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들로 인해 힘들어하던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우리 셋은 함께 캠핑이나 등산도 같이 가곤 했는데 언젠가 바다에 함께 놀러 갔다가 바닷속에서 서로를 밀치며 장난을 치다가 진이와 몸이 닿았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으레 장난을 치듯 우리는 장난으로 진이의 성기도 만지게 되었고 그렇게 놀면서 점점 내 성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진이를 남자로서 좋아하는구나.'

그땐 진이도 어린 나이라서 내가 성기를 만지면 발기했다. 아직 그런 신체적인 반응과 성적 취향의 관계에 대해 경험이 많이 않았던 나는 진이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장난 그만 하라는 식으로 끝났고 어느 날 진이 혼자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자는데 이불을 덮고 진이 옆에 딱 붙어있으니 너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진이로 인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갔다.

물론 진이는 게이가 아니었고 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의 장난은 그 정도에서 끝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느 대학생처럼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끝나버린, 나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그 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였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게이 커뮤니티 '엑스존'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홍석천 씨도 공개적 커밍아웃으로 사회적으로도 게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었다. 홍석천 씨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극과 극 같았지만 내 주변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비난을 받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때까지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서 내 상황을 식구들에게 이야기할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떼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갔다.

그 후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집에서 인터넷 카페를 통해 게이들과 소통하곤 했는데 마침 내가 열어놓은 인터넷 카페 로그인한 페이지를 미처 닫지 못한 것을 누나가 컴퓨터를 쓰려다가 보는 일이 일어나버렸다. 그리고 아마 누나가 이야기를 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도 알게 됐다.


'차라리 잘됐어. 계속 숨길 수는 없었잖아.'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한 내 성 정체성을 가족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면,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게이라는 것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시간 동안 마치 들키면 안 되는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늘 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사는 기분이었다. 여느 가족보다 우리는 끈끈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위로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우리 가족만은 나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온 가족이었고 반대로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기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하는 일)을 했다.



"내가 잘못 낳았다. 내 죄다. 내 죄야."



엄마의 말에 나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엄마가 말 한 마디는 그대로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고 내 모든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의지하고, 내 편이라 생각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가족들이 날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과 고통이었다. ' 내가 잘못 낳았다.’ 라는 말이 내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마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창피해지며 온 가족의 수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 그 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니. 괜찮아." 라며 안아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한동안 감금 상태로 집에 있었고 엄마는 쓰러져 드러누우셨다. 차라리 날 때리고 탓하고 화를 내셨다면 뭐라 말이라도 했을 텐데 엄마는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며 우시기만 했다. 내가 움직이기만 하면 어디 나가기라도 할까 봐 온몸을 떠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마치 내가 집 밖에 나가면 안 될 전염병 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자존감이 아예 없어진 것처럼 떨어져 버려서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게이 카페에서 활동을 중단했고 거의 감금 상태처럼 몇 달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내 성정체성을 부정했다. 식구들을 위해 부정 해야만 했다.


' 내가 없어지는 게 낫겠어.'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여행을 떠나 집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내가 너무 현재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가족들로부터 내가 눈에 띄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 시급도 높고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수 있는 몸을 혹사할 수 있는 막노동을 매일 하기 시작했고 몇 달 후 호주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을 하듯 도망쳐 떠나온 호주에서 나는 내 인생의 보물이 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여행이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너무 견딜 수 없이 현실이 힘들 때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때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조금 멀리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공항에 도착하니 엄마가 미리 마중을 나와 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행복이부터 안아보시며 '많이 컸네~'하시는 게 영락없는 할머니의 모습이셨다. 나도 오랜 비행에 행복이를 돌보느라 조금 지쳐있었기에 엄마에게 행복이를 맡기고 함께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평일이라 다행히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행복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해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여기 한국이지.'라는 게 실감이 났다. 아이들이 조금 떠들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호주의 문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나도 오래 떠나 있었던 동안 잊어버렸었다. 그래서 행복이에게 조용히 해야 한다고 '쉿~'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눈치가 보여 어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고향에 도착해, 큰누나를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본 것이었는데 우리 사이에는 서먹한 분위기가 내내 흘렀다. 우리의 서먹함에는 이유가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