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오롯이 나에게만 관심이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
나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도
"왜 나에게 그렇게 대하느냐"는 생각이 늘 먼저였다.
세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고,
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40이 넘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라
부모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뀐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이의 아빠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나만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조금 미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내 감정이 우선이고,
내 욕망이 기준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요즘 젊은 세대가
왜 연애가 어렵다고 느끼는지,
왜 관계가 버겁다고 말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속에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도 그랬다.
자기애가 너무 커서,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품고,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 자리에 서면서
비로소 내가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는 걸 느낀다.
사랑은 ‘나’에서 시작하지만,
진짜 사랑은 ‘나를 넘어선 사랑’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토요일, 스티븐 어머니의 생신과 함께 열린 송별회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보탰다. 스티븐 어머니의 친구분들, 총 11분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대접했는데, 식탁에 둘러앉아 웃으며 식사하시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자리를 그저 ‘수고로운 일’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그 사람이 그것을 기쁘게 받아줄 때, 그 감정이 얼마나 깊고도 오래가는 만족감을 주는지를.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남을 배려한다’는 것이 단지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고, 나를 이해해 주고, 나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길 바랐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사랑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랑 안에 담긴 기쁨은 더 늦게, 그러나 더 깊이 배워가는 것 같다. 아마 이것이, 부모가 되고, 가족의 일원이 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