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던 나로선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주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바빴다. 길거리는 반짝이는 조명으로 가득하고, 각종 행사가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 스티븐은 다음 주 행사 준비로 새벽 근무자들과 근무 교환을 요청하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한국의 소식은 모든 것의 중심을 흔들어 놓았다 . 그이야기를 듣고 나는 바로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정작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한국은 지금 별일 없어. 그냥 평소랑 똑같아."
나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떻게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가족의 목소리에는 불안이나 긴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호주의 연말 행사가 나를 더 정신없게 만들고 있었다.
스티븐의 말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한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대."
계엄령. 듣기만 해도 묵직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단어였다. 한 나라의 정상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으로 이렇게 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그 무게가 정말 제대로 평가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상황을 떠올릴수록 의문이 커졌다. 한 사람의 감정이, 혹은 판단이 한 나라를 그렇게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니.
사실, 나는 호주에 오래 살면서 한국 정치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한다. 뉴스는 물론 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장의 분위기를 다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스스로를 돌아보니, 내가 사는 이곳 호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란 결국 사람 사는 곳마다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호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내가 사는 멜버른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락다운을 262이나 한 곳이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내리는 결정이 그들의 감정이나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임을 너무 자주 본다. 각종 논란 속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사퇴를 거부하거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같은 의문을 가진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이 말은 사실이고, 그래서 더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체념할 수는 없다. 나는 적어도 내 삶 속에서,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책임을 지는 태도를 실천하고 싶다. 행복이에게도 가르쳐주고 싶다.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직면하고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12월 벌써 시작했는데 오늘 갑자기 행복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부탁을 한다. 그리고 나 행복이와 약속을 했다. 크리스마스까지 매일 하나씩 열어보는 레고 어드벤트 캘린더를 준비하기로. 하지만 내가 계산하지 못했던 건, 이미 12월이 시작되면서 저렴한 제품들은 전부 품절이라는 현실이었다.
나는 쇼핑센터를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이 가게, 저 가게를 지나며 찾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대부분의 어드벤트 캘린더는 팔렸고, 남아있는 것들은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마음 한편에 '이 정도까지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속을 떠올렸다. 행복이와 했던 그 작은 약속이었지만, 아이에게는 큰 의미일 터였다.
"매일 하나씩 열어보면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자!" 내가 건넨 이 말이 얼마나 행복이의 마음에 설렘을 안겨줬을지 상상해 보니,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다잡고 남아있는 비싼 레고 캘린더를 구매했다. 계산을 하며 잠시 망설였지만, 행복이가 레고를 하나씩 열어보며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니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 돈이 단순히 레고를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와의 약속을 지키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걸까?"
한 나라의 수장이 국민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나라를 휘둘러버리는 모습을 보면,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들은 신뢰를 잃고,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우리 가정에서의 신뢰는 행복이와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도 이 단순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약속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국민과 맺은 신뢰의 기둥이다.
결국, 나는 행복이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싶다. "약속은 지키는 것이고, 신뢰는 함께 만들어가는 거야." 그 신뢰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지키며, 더 나아가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