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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순간

2016년 6월 13일

by Ding 맬번니언


오늘 CSG사장님을 만났다. 지난주 연락을 받고 이야기를 나눠보았고 나는 CSG로부터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요청을 받았다. 회사 유니폼 제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기에 먼저 회사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일 것 같기도 하고 만나서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 나누기 위해 오늘 시간을 내 CSG본사에 갔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생소하기도 하고 왠지 모를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좋은 기회이니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며 집에 돌아와 아틀리에에서 일을 시작했다.


" 행복아~ 잠시만~ 아빠 이 일만하고 놀아줄게~ 저기 가서 행복이 좋아하는 보면서 잠깐 놀고 있어~"


한창 일에 집중하려 하는데 행복이가 날 보고 웃으며 계속 놀아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요즘엔 늘 이런 식이다. 조금만 일에 집중하고 싶은데 행복이가 날 혼자 두려 하지 않는다. 신생아 때에는 누워있기만 했기 때문에 무언가 내게 요구사항이 있어도 우는 것 이외에 다른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걸을 수 있는 만큼 행동반경도 넓어지고 그만큼 언제, 어디에서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어졌다. 아차 하고 잠시 시선을 놓쳐버리면 큰 사고로 이어져 다칠 수도 있었다. '아이가 다칠만한 걸 미리 치워두면 되지 않나요?' 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아이들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다친다. 그래서 아무리 떼쓰는 행복이가 미워도 계속 시선 안에 두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없어.. 왜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행복이가 보이지 않았다. 작업할 유니폼에 대해 생각하다가 놀아달라는 행복이 말에 순간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와 한숨을 쉬고 행복이를 불렀는데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어버렸고 미친듯이 행복이를 부르며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행복이는 아틀리에 안에 있어 바로 찾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너무나 길고 느린 불행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내딛고 있는 땅이 그대로 꺼져버려 내가 암흑 같은 지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놀아주고 대답해줬어야 했는데..'

'무시하는 날 보며 행복이가 얼마나 슬펐을까.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어디 다쳤거나 떨어진 건 아니겠지? 아까 내가 그걸 치웠나? '

'이까짓 게 뭐라고 행복이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무시해버린 걸까. 내가 정말 부모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 걸까.'


어쩌면 행복이를 데려올 때부터. 아기 때 행복이를 돌보며 3~4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는 생활을 할 때부터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이런 순간에 대한 것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체력이 필요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줘야 하는 부모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나는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육아의 현실을 하나씩 깨달아갈수록 원래 내가 가졌던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포함해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끝나감을 누구보다 깨달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하루 24시간을 부지런하게 보내도 아이를 돌보며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자는 시간을 줄이고 먹는 시간을 줄이고 나 자신에게 쓰는 시간을 줄일수록 행복이에게 쏟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나는 점점 더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되어갔고 누군가를 만나 '요즘 어떻게 지내?' 라는 말에 '행복이가 요즘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야' 이런 이야기 빼고는 할만한 이야기가 없어져 갔다. 나에게는 아무런 특별한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만 더, 이번에만, 정말 아까운 기회라서 같은 말을 붙여가며 꾸역꾸역 해나갔던 것은 오직 나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틀리에서 일하면서 행복이에게 훌륭한 아빠가 될수 있다고 나는 해낼 수 있다고 자신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 나는 행복이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지르며 정작 옷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행복이의 아빠가 된 것이 아닌데... 두 가지 중 선택하라면 당연히 내 선택은 행복이였다.


더 이상 패션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답답하고 지루해질 앞날에 대한 아쉬움 정도였다면 행복이가 잠깐 내 눈앞에서 사라져 행방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 내가 밟은 모은 땅이 꺼지고 공기가 모두 사라져버린 암흑처럼 느껴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어떤 객관적인 판단력보다 내 몸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행복이와 다른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선택은 행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알렉스의 경우만 봐도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가 와서 걷지도 못하는 그 아이를 보니 더 뚜렷해졌다. 무엇이 나에게 우선순위인지...


행복이가 부르면 다정하게 일일이 대답해주고,

하나,둘 첫 숫자를 세고 처음 자기 이름을 쓸 때 내가 알려주고,

학교에서 숙제나 고민을 가져오면 함께 하루 종일이라도 고민해줄 것이다.

나는 행복이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순간에 함께 해주고 싶다.

별일이 없다면 물론 앞으로 행복이와 나는 수십 년의 평생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부모님들의 생각처럼 정작 아이가 부모를 필요로 하는 순간은 많지 않다. 아기 때에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니 매일 찾고, 어린 아이일 때에도 사소한 모험 하나도 부모님과 함께하며 모든 이야기를 가장 먼저 나누고 싶어하지만 학교에 가고, 청소년이 되고, 사춘기가 오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부모의 생각처럼 아이들에게 부모가 늘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때가 되어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 가는 동안 짧은 순간만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그 순간 행복이 옆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행복이가 나이를 먹고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때 다시 패션이든지 다른 일이 든지 또 다시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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