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낯섦 사이, 두 달의 첫걸음
파리의 첫 아침, 8월 하순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햇살 속에는 분명 다른 냄새가 배어있었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도 서울은 폭염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숨 막히는 여름을 뒤로하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훌쩍 건너 도착한 이곳의 공기는 이미 다른 계절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가을 냄새라 하기엔 아직은 어설펐으나, 그 안에는 이미 여름과는 다른 계절의 기척이 숨어있었다.
나의 마지막 파리는 8년 전이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30년 전 여름, 학업을 위해 리옹에서 파리의 대학으로 옮겨온 시간이 있었다. 그 여름은 내 삶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파리의 시작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익숙함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지금의 풍경은 세월이 빚어낸 어색함을 품고 있었다. 낯설지 않으면서도 낯선 도시 – 그 이중적 감정 속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첫 발을 옮겼다.
익숙했던 듯, 그러나 낯설어진 풍경 속을 나는 조심히 걸었다. 숙소가 자리한 파리 15구의 '바스코 드 가마' 길거리(Rue Vasco de Gama)는 아침의 고요에 잠겨 있었고, 빛은 돌길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돌길 위에 기억과 현재가 어색하게 포개지는 이 도시의 호흡에 나를 섞어 보고 싶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파리가 나를 어떤 표정으로 맞이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무표정함조차, 내겐 오래간만에 다시 찾아온 설렘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산책 삼아 숙소 근처를 익히려 이리저리 걷다 보니, 어느덧 발걸음이 은근히 길어져 있었다. 거리에 행인도 조금 늘어나, 아침의 고요가 서서히 풀려가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이 멈췄다. 얼마간 걷느라 지쳐있던 탓일까, 마침 눈에 띈 카페 간판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카페 엘라”(Café Ella). 동네 카페치고는 세련된 외양이 눈길을 끌었다.
노천(露天)보다는 조용한 안으로 들어서자, 작지 않은 카페였다. 브런치도 하는 카페로 널찍한 공간에 손님들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 나는 커피를 주문한다. 여기선 그냥 커피라 하면, 작은 잔에 진하게 담겨 나오는 에스프레소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는 카페인에 민감한 탓에 뜨거운 물로 조금 더 연하게 만든 디카페인 커피로 '데꺄 알롱제'(déca allongé)를 함께 주문한다.
“Un café et un déca allongé, s’il vous plaît.”
낯선 억양으로 처음 건넨 불어 한마디였지만, 잠시 뒤 빨간 잔에 담긴 두 잔의 커피가 우리 앞에 놓였다. 단순한 커피지만, 파리의 첫 아침을 여는 인사처럼 각별하게 느껴졌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음미하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진짜로 두 달을 함께 할 파리의 시간이 시작되는구나.”
잔을 감싸 쥔 손끝에 남은 열기가 문득 전날을 불러냈다. 인천공항 대합실은 냉방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떠나온 도시는 여전히 숨 막히는 여름 더위에 갇혀 있었다. 승객들 모두 자리를 찾아 앉았고, 나도 설렘에 이끌리듯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출발은 지연되었고, 좌석에 갇힌 기다림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창밖으로는 활주로의 빛이 일렁였으나, 비행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설렘은 서서히 피로와 무기력 속에 가라앉았다.
예정된 시각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고, 출발은 한 시간 넘게 늦춰졌다. 지루함의 끝에서 마침내 굉음이 일었고, 구르는 바퀴의 진동은 내 몸을 전율처럼 흔들었다. 순간, 기체는 앞바퀴를 들어 올리며 하늘을 향해 거대한 몸짓으로 날아올랐다. 동체가 오르는 동안 귀는 막혔다 풀리기를 반복했고, 구름 속을 가를 때는 몸체가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이내 정상 고도에 닿자, 마치 긴 숨을 고르듯 안정을 찾았다.
객실 안에는 다시 움직임이 생겼다.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승무원들은 서둘러 통로를 오갔고, 승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긴 비행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잠에 빠지는 이, 영화에 몰두하는 이, 책장을 펼치는 이, 그리고 통로를 오가는 이. 그 작은 좌석마다 각자 나름의 이유와 사연을 안고 파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세상 누구도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모습만큼이나 나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나 또한 그들 틈에 앉아 내 나름의 사연을 안은 채, 파리를 향해 하늘을 건너고 있었다.
카페를 나서자, 이른 가을의 빛이 길 위에 얕게 깔렸다. 작은 상점들은 아직 느릿한 손길로 문을 열고 있었고, 빵집 진열장에는 막 구워낸 듯한 바게트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호밀의 거친 향과 담백한 속살이 첫날엔 어울릴 것 같아 '호밀 바게트'를 골랐다. 아내와 함께 길을 걸으며 한 입씩 떼어먹자, 은근한 빵 냄새와 길 위의 햇살이 겹치며 파리의 아침이 한 발 더 다가왔다.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무심히 걷던 발끝에서 '15 구청'(Mairie du 15 ème)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8년 전 머물던 숙소도 이 근방으로, 바로 ‘블로메' 길(Rue Blomet)에 있었다. 무심히 걷는다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의 기억이 나를 이끌어온 모양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방인으로서 이 도시의 숨결을 더 깊이 들이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파리의 묘한 속도를 느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이 도시만의 리듬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15 구청' 그 주변 길가의 가게들 중 몇몇이 내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작은 중국 음식점 ‘아시아 구르메‘(Asia Gourmets)가 눈에 들어왔다. 8년 전에도 들렸던 곳이라 반가움에 들어섰다.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소박한 음식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정의 첫 점심이 과거의 기억과 겹쳐지는 순간, 그 한 끼는 유난히 각별한 의미로 다가와 더욱 특별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숙소로 오는 길에 동네 슈퍼마켓과 유기농 전문 식료품점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샀다. 파리에서의 삶을 위한 작은 준비이자, 이방인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다. 사소한 장보기조차 이 도시의 풍경과 포개어져 새로운 경험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여행자의 발걸음을 딛고 있지만, 동시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서서히 내 안에 번져왔다.
이래저래 한나절 남짓 걷고 온 다리에는 묵직한 피로가 내려앉았다.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니, 햇살은 고요히 기울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여전히 서투른 가을 냄새가 감돌았다. 전날 활주로의 굉음과 기체의 떨림은 이미 멀어진 기억이 되었다. 대신 오늘의 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 무언의 도시 속에 서서히 스며들며, 두 달의 시간을 이제 막 열어가고 있었다.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파리의 첫날은 이렇듯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낯설지만, 동시에 오래된 기억처럼 익숙한 얼굴로 다가왔다. 따가운 햇살과 이른 가을 냄새 속에서 나는 묘한 안도와 설렘을 함께 느꼈다. 떠나는 날의 폭염이 아직 몸에 남아 있음에도, 이곳의 바람은 다른 계절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 두 달의 시간은 또 하나의 여행이라기보다, 다시 마주한 나 자신을 향한 회고와 사유가 될 것임을. 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환영이었다. 세월이 남긴 과거와 현재가 포개진 자리,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서 나는 두 달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방인의 고요한 가을은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