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이 자연과도 너무 닮아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내 머릿속에 찾아들었다. 사계절이 변화해 가는 모습에서 인생이 흘러가는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인생의 가을쯤 다다른 것 같다. 지난 여름날의 울창했던 녹음(綠陰)을 뒤로하고, 낙엽으로 흩뿌리기 직전의 아름다운 단풍을 수놓을 시기에 온 것이다.
같은 가을, 그러나 다른 가을
어릴 적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의 연속이다. 파란 하늘아래 만국기(萬國旗)가 휘날리고, 가을 운동회가 열린다. 흰색과 검은색 머리띠를 한 우리들은 하루종일 학교 운동장을 함성의 도가니로 만들면서 뛰어다녔다. 일 년에 몇 번 먹을 수 있었던 김밥과 바나나, 초콜릿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행복의 하루였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산자락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었던 가을 소풍, 부모님과 떠난 가을 단풍여행...'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분에 넘치도록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의 추억들이 많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의 가을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던 기억들만 가득하다. 하루를 보내며 가을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가 없던 시간들이 훨씬 많았다. 특히 임원이 되고 난 이후의 가을은 우울한 계절이었다. 대부분의 회사는 여름휴가가 끝나고, 긴 팔 옷을 꺼내 입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다음 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해에 대한 평가와 마무리를 진행한다. 물리적인 바쁨도 있었지만, 임원이 되고 나서는 곧 있을 계약연장 여부 때문에 언젠가부터 우울증 증세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파리 목숨'의 파리가 내년에 살아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계절이었다.
퇴직을 하고 처음 맞이하는 가을이 왔다. 여유롭다. 아름답기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길거리 은행잎이 노랗게 변해가는 시시각각을 다 관찰할 수가 있다. 가을 하늘의 높고 맑음도 원하면 언제든지 쳐다볼 수 있다. 얼마전 결혼기념일을 맞아 다녀온 제주여행에서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흠뻑 즐기고 돌아왔다. 인생의 가을에 느끼는 계절의 가을은 오랜 세월 굽이진 길을 돌아 온 나를, 처음 만난 그 느낌으로 기다려 준 첫사랑의 느낌이다.
자연을 통한 삶의 성찰
궁금하다. 우리처럼 사계절의 변화를 모르는 추운 곳이나 더운 곳에서는 어떤 느낌으로 삶을 되돌아볼까? 일 년 내 덥기만 하여 겨울날 눈 내리는 정취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눈 내리는 날의 정서로 이해하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해 낼까? 일 년 내 춥기만 한 곳에서는 우리가 느끼는 더운 여름날의 역동적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 낼까? 궁금하다.
신기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에 기대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그런 면에서는 사계절이 존재하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풍요로운 일인 지, 뜬금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다. 삶에 대한 성찰이 살고 있는 곳의 자연과 흡사하다는 발견이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