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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001 경북 성주 시골의 6살 꼬마아이

by 우상권


나는 경북 성주군 선남 면 그중 가장 끝에 있는 시골 중에 시골에서 태어났다.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추측하겠지만 굳이 태어나지 않아도 될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아들이 귀한 시절에 종가 집으로 시집간 운 나쁜 어머니께서는 첫째를 집안의 어른 모두가 원하는 아들을 낳는데 실패했다. 재빠르게 둘째를 가졌지만 또 딸을 놓으셨다. 종가집이라 집안의 가업과 제사문화를 이어갈 장자가 절실했지만 어머니는 둘째까지 실패를 맛보며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홀로 견뎌야만 했다.

계속되는 도전으로 셋째를 가지셨고 드디어 첫 고추가 탄생이 되었다. 종가집의 장자가 드디어 태어났고 그이후로는 자식을 더 이상 욕심내지 않으셨다. 하지만 금술이 좋은 탓에 넷째인 나를 가지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아이 셋을 돌보는 일에 종가 집 살림에 농사일까지 거들며 삶이 버겁기만 한 탓에 몇 번이나 산부인과를 찾고는 막내인 나를 낙태하려고 하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동의가 있어야만 낙태가 가능했었고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도 소중한 인연이라며 낙태를 극구 반대 하셨고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실랑이를 하다가 어머니의 배가 너무 불러와 낙태의 시기를 놓치게 되어 마지못해 나를 낳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나 6살 12월까지 성주 시골집에서 살았다. 나의 기억은 6살부터 이어진다. 그전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아마도 6살에 나의 가정에 큰 사건이 있어서인지, 그 사건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그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의 기억의 시작인 6살 그 사건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너무나 평화로운 집안에 하루아침에 한가정이 풍비박산이 날수가 있다는 말이 지금 되돌아보면 실감이 된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성주 선남 면에 제일가는 부자 집 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지게를 메며 주변 동네일을 도우며 받은 일 삯을 모아서 밭을 하나둘씩 악착같이 모아 부를 이루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장자인 우리 아버지께서 집안일의 모든 것을 도맡아서 하셨고 집안의 권한 또한 쥐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 집에 다녀오신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나간 후 아버지를 영영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날도 꿈자리가 좋지 않다며 아버지의 외출을 서둘러 말리셨는데 기어코 나가겠다며 외출을 말리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셨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렸고 빗물에 미끌어져 나무에 부딪쳐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이후 할아버지까지 충격으로 쓰러지셨고 당뇨에 풍에 온갖 질병이 한꺼번에 할아버지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내가 6살 7월에 돌아 가셨는데 거의 반년을 어머니의 울음으로 아침을 깨고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주변 이웃들이 자식 넷을 두고 간 아버지를 원망하고 뒤돌아서 어머니를 위로하셨다.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의 정신적인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다. 주변이웃 어른들이 우리 4남매를 거의 돌보듯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반년 동안이나 삼 배 옷을 입은 채 정신이 나간 듯 어머니는 울다 지쳐 잠들곤 했다. 어릴 적 6살의 기억 중 교회의 기억이 참 많이 난다. 6살 12월의 크리스마스 날 시골에 봉고차 한 대가 먼지를 뿜으며 들어왔고 그 차에는 시골 아이들이 줄을 서서 타고 읍내에 있는 교회에 갔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였지만 나는 슬펐다. 교회안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님의 품에 안겨 화목을 그리고 있었지만 나는 어디 누군가에게 안길 곳 없이 교회 통로주변을 이리저리 헤 메며 다니다 결국 울음이 터졌고 엄마를 찾으며 소란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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