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장사의 시작 018) 꿈 넘어 꿈
첫1호점을 시작한지 3년 만에 2호점 매장을 오픈해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 1년이 지나 3호점 매장을 오픈했을 즈음에 아내와 나는 꿈꾸던 백만장자가 되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했던 나의 삶이 장사 하나로 백만장자가 되었던 것이다. 백만장자가 되면 아내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작은 상가를 사고 그곳에 일정한 불로소득을 갖춘 뒤에 호주로 떠나기로 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막상 백만장자가 되고나니 사업의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고 나를 따르던 직원들도 나와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내와 다시 의논을 하고 인생의 플랜A는 잠시 접어두고 플랜B로 계획을 새롭게 짰다. 이렇게 아내는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었고 또 한번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좀 더 과감하게 지금 하는 사업을 조금 더 확장하기로 했다. 늘 걱정이 많던 어머니께서는 사업을 더 이상 늘리지 말라며 나의 사업열정을 말리셨지만 나는 나의 고집대로 계속해서 확장을 했다. 1년에 2개씩 매장을 오픈하며 계속해서 회사의 시스템을 점검하고 판매 레시피를 섬세하게 만들어 갔다. 우리가 믿고 잘할 수 있는 브랜드매장이었기에 오픈하는 것마다 빠르게 자리를 잡고 매출고를 만들어 갔다. 그때부터는 내가 꿈꾸는 미래는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직원들 모두의 것이었다,. 회사의 정체성을 위해서 로고와 슬로건을 직원들의 공모전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케릭터까지 만들었고 그것을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회사가 성장하는 것만큼 여러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직원들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키워주었다. 그렇게 힘차게 전진만 하다가 갑자기 큰 변수가 생겨났다. 2020년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2020년 1월 회사 부장들과 일본에 가서 브랜드 탐방을 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그 후 바로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공항이 폐쇄가 되고 아주 갑작스럽게 세상은 온통 코로나 이야기로 덮이게 되었다. 중국 우한에서 괴상한 질병으로 길거리에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과 오한과 발열로 하루에 수천명씩 죽어 간다는 뉴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이니깐 그렇겠지.. 라는 생각에 가벼운 이웃나라의 유행독감 이야기로만 느꼈다. 그러던 2020년 2월 우리나라에도 중국으로부터 전염된 질병을 앓는 환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고 하루가 멀게 그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 어느덧 TV만 켜면 온통 코로나 뉴스거리가 나왔고 화면 맨 위에는 코로나 질병자 숫자를 실시간으로 표시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스나 조류독감 같은 사회적 이슈로 끝이 나겠지 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대구에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신천지라는 3번 감염자로 인해 순식간에 그 질병이 전염되고 있다는 뉴스 보도가 나왔다. 그 이후 사망자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밖을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길거리에 난생 처음 겪는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도로는 사람이 걸어 다녀도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고 길을 걷는 사람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매장도 마찬가지 고객님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0원의 매출을 찍었다. 전체 매장 9 곳 모두가 매출이 없는 날의 연속이었고 불안을 넘어 공포를 실감했다. 코로나에 걸려 죽는 두려움보다 장사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눈을 감아도 앞이 캄캄했고 눈을 떠도 앞이 캄캄했다. 나의 최선과 열심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해결방법을 찾는 것이란 도무지 없었다. 하루 이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현실에 낙담만 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장하고 자금을 비축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쩜 지금과 같은 위기에 견디라고 평소 그 힘을 주신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맨 먼저 직원들에게 단한명도 무급휴무나 해고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 그 당시 주변 상가들이 하나둘씩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강제 무급휴무를 돌리며 매장 손실을 최소화 할 때였다. 우리매장 직원들도 해고에 대한 불안 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나의 약속으로 불안의 불씨는 꺼지게 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부탁을 했다. 똑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고 고객님이 있든 없든 평소와 똑 깥이 우리가 할 일을 찾아서 하자고 했다. 그리고 일과 후에는 일정기간동안 퇴근 후 술자리를 삼가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자고 부탁했다. 직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나의 의견에 따라주었고 각 매장의 점장들은 집에 무사히 들어간 인증 샷을 나에게 보내주어 애써 나를 안심 시켰다. 그 당시 정부는 코로나 환자가 나오면 전염자의 동선에 따라 모든 매장에 폐쇄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폐쇄된 매장은 소문이 금방 나서 장사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데미지가 컸다. 모든 것 모든 상황이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새벽에 광고 문자 알림 하나가 울리면 매장에 무슨 일이 생겨나 점장들이 메세지를 보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깜작 놀라서 잠에서 깨는 것이 십상이었다. 그렇게 매일 새벽이면 텅 빈 매장을 돌면서 소독을 했고 매장 입구에는 “여기는 매일 자체소독을 하는 청정지역입니다.” 라는 포스트를 붙여두었다. 그것이 리더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뿐이라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관리하던 건물상가에 임차인들이 부담되지 않겠냐며 월세를 단 몇 달이라도 깎아주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죽을 판인데 남을 도와주라는 아내의 말에 사실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나마 그 월세로 지금의 손실을 작게나마 매 꾸어 나가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깎아주라는 말에 아내도 이번일로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는가 싶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도무지 머리로는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아내의 말이기에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임차인들에게 문자로 힘내자는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일정기간동안 월세를 깎아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나같이 진한 감사의 인사의 답장이 왔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다. 늘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라는 막연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일 기록적인 적자를 맛보며 코로나가 시작 된지 3,4개월이 지난 뒤 정부는 재난 지원금에 대한 정책을 발표를 했다. 어느 순간 폐허가 되어버린 동네거리를 살리자는 취지였고 소득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금액을 지급하며 시민들과 자영업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거의 대부분의 매장들은 코로나이후 문을 닫고 모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매장 만큼은 단한명도 빠짐없이 출근을 하였고 단 하루도 문을 닫는 날이 없었다. 막상 재난 지원금이 풀리고 나니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는 우리매장에 고객님들이 재난지원금을 들고 하나같이 몰려 들어왔고 거의 매일 기록행진을 하며 판매고를 이어갔다. 일정한 매출이상이 되면 추가 상금을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직원들은 매일같이 두둑한 상금을 받아갈 수가 있었다. 모두가 위기로부터 도망가고 흩어질 때 우리는 위기일수록 자리를 지키며 하나가 되어 똘똘 뭉친 결과물이었다. 지금도 코로나를 생각하면 그때의 희노애락이 진하게 묻어나 나의 마음속 깊이 멋진 훈장이 되어 자리 잡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