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움과 두려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시럽 한 펌프만 더..
찐~하게 마시고 싶어요.
지팡이를 가지런히 세워놓고 초코라테를 기다리고 있다. 휠체어의 시선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포리(카페 매니저님 강아지)가, 우뚝 서있는 상태에서의 시선에는 아주 잘 보여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
포리야~ 아고 귀여워라(반함)
나른하게 누워있으니 덩달아 나도 나른해지네^^
”찐~하게 탔어요^^
그나저나 몸 진짜 많이 좋아졌네요! 이제 지팡이 하나로 걷는 거예요? “
“네! 저 많이 컸죠?(미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왼손에는 초코라테,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으며 병실로 올라가고 있다. 중간중간 보행하면서 마시는 초코라테의 맛은, 신이 주신 축복 그 자체였다.
보행기를 막 뗀 아기에게 자아가 존재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온 동네방네 “나 이제 걸어요~” 하며 자랑하며 다니고 싶다ㅋ
지팡이 두 개에서 하나로 보행하는 재활과정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두려움을 없애자라는 마인드가 크게 작용했다.
아니! 내가 중심만 잘 잡으면 지팡이 하나로 보행하는 건 문제없이 않나? 한 번 시도해 보자 하며,
한 발을 내딛고 그 자세에서 1분을 버티고
1분을 버티면 다른 한쪽 발을 내딛고 또 1분을 버티고.
이런 식으로 복도 한 바퀴를 도는 운동을 꾸준히 하니 걸을 때 휘청거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계속 오른손으로만 짚고 다니면 나중에 척추 불균형 오는 거 아닌가? 그리고 밖에 나가면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알고.
또 만약에 오른손을 다치게 되면 왼손으로 짚어야 할 텐데.. 안 되겠다! 운동 방법을 좀 바꿔보자 하며,
한 주는 오른손으로만 짚으며 보행
그다음 주에는 왼손으로만 짚으며 보행.
이렇게 운동 방법을 바꾸니 자연스레 어느 손으로 짚어도 중심이 잘 잡혀 예전보다 걷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멍청하게 운동하다가, 머리 쓰며 운동하니 몸이 확실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항상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다시 확인해 보자.
일회용 소변줄 챙겼나? OK
멸균장갑이랑 젤 챙겼나? OK
혹시 모를 대참사를 대비해, 속옷이랑 반바지 챙겼나? Ok
물티슈랑 이어폰, 땀 많이 흘리니까 헤어밴드도 챙기고 등등.
짐은 이 정도면 OK.
이제 옷 입자.
아 근데 슬랙스 바지에는 신발을 더비슈즈나 로퍼 같은 걸 신는 게 더 이쁜데..
이제 구두처럼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신발들은 못 신겠지? 굽도 있으니 더더욱 힘들겠네ㅠ
아직 어리고 청춘이긴 하나보다
장애인이 돼서도 멋지게 입고 싶은 마음은 예전이랑 다를 게 없네(머쓱)
“3시간이요!? 아니 그렇게 오래 걸려요?(당황)”
오전 외래진료인 대학병원 진료를 마치고 파마를 하기 위해 미용실에 온 나는 담당 미용사분께서 말씀하신 소요시간을 듣고 깜짝 놀라 하고 있다.
“머리가 생각보다 많이 길어서 더 오래 걸려요. 여자머리로 파마하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연애했던 여자친구와 미용실을 갔던 게 생각났다. 당시 히피펌을 하겠다는 여자친구의 미용시간을 기다려 준 적이 있는데, 그때도 3시간 정도 소요된 거로 기억한다.
여자들 진짜 대단하네.. 미용실에서 어떻게 3시간씩이나 있지?
와 근데 오기 전에 소변 누고 와서 다행이다. 건물에 장애인 화장실도 없었던 거 같고 머리가 꼬불꼬불 말린 상태에서 화장실 가려면 가방에서 일회용 소변줄 꺼내고, 멸균장갑 챙기고, 젤 챙기고..
그리고 대변이 마려운 감각이 미세하다 보니 소변 누고 나서 항상 변기에 앉아보는 습관이 생긴지라 혹시 모르니 물티슈도 챙겨야 하고. 에구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계산해서 움직여야겠다. 오랜 시간 있어야 하는 장소가 있으면 물 마시는 양도 생각하면서 마셔야지.
근데 얼마나 지났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았네..
긴 시간에 걸쳐 남자의 로망인 장발머리 파마를 완성하고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로 가고 있다.
택시 안 룸미러와 핸드폰 화면에 비치는 내 모습을 자꾸만 확인하고 있다.
멋있는 거 같기도 하고..ㅋ
택시에 내린 나는 유리창 너머에 있는 친구의 얼굴을 확인한 후 조용히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낙상사고가 있었던 2021년 4월 19일 월요일.
하루 전 날인 18일 일요일에 나는 가게문을 들어와 친구에게 다정하게 인사하고 있는 이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으로.
“진짜 파마했네? 머리 그렇게 하고 지팡이 짚으면서 들어오니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마법사 같네ㅋ“
“오 마법사? 오히려 좋아ㅋ 나 사진 찍어주라.”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너 퇴원하고 주말에 여기 올 때 조심해야겠다. 너도 알겠지만 주말에 사람 진짜 많잖아. 어깨빵 조심해야 해. “
“아 맞네.”
다치면 곧바로 치료해 주시는 간호사님.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 상태 체크해 주시는 주치의 선생님.
운동이 너무 힘들어 힘이 없고 피로할 때 수액 좀 놔달라고 하면 바로 놔주고,
치료시간 때 몸이 뻐근하다고 하면 친절하게 마사지해 주시며 풀어주시는 치료사 선생님들이 계신 안전하고 편안한 병원 울타리 안을 벗어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준비 잘하고 나가야지.
사회생활 하며 돈도 벌어야 하니.
“나 이제 곧 복귀해야 할 시간이야. 가기 전에 인생 네 컷 하나 찍을까?”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이 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만 해도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많이 느껴졌는데.
동정의 시선과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다시 취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나 있을까?
안전하고 편안한 이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