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경제학은 오랫동안 자본주의 비판의 지적 기반으로 기능해왔다. 착취, 잉여가치,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개념 체계는 분명히 나름의 내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으며, 불평등과 계급 갈등을 분석하는 데 있어 일정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 주장들이 현대 경제학의 시각에서. 특히 네오케인지언과 포스트케인지언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이론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함은 단순히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현실을 분석하는 방법론 자체의 문제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토대는 노동가치론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명제는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착취론의 논리적 출발점이 된다. 문제는 이 노동가치론이 실제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가격은 노동투입량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희소성, 수요, 기대, 그리고 생산 과정에서 자본이 수행하는 독립적인 역할 모두가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네오케인지언 경제학은 힉스의 IS-LM 모형에서 출발하여 재화시장과 화폐시장의 동시 균형이라는 틀 속에서 산출량과 이자율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분석한다. 이 모형에서 가격은 노동시간의 함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 유동성 선호, 투자 기대 등 복수의 변수가 맞물려 형성되는 결과물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이런 다변수적 현실을 단 하나의 축으로 환원시키는 지나친 단순화이며, 그 단순화는 이론적 우아함이 아니라 분석적 빈곤이다.
잉여가치론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이윤을 오로지 노동자로부터의 착취. 즉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에서 임금을 뺀 나머지의 전유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자본 자체가 생산 과정에서 독립적인 기여를 한다는 사실을 구조적으로 부정한다. 현대 경제학에서 자본의 한계생산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포장이 아니라 실제로 측정 가능한 경제적 변수다. 설비 투자, 기술 개발, 위험 부담. 이 모든 것이 생산에 기여하며 그에 따른 보상을 정당화한다. 폴 새뮤얼슨이 기존 경제학 체계를 수리적 기반 위에 올려놓으면서 보여준 것처럼, 생산함수 내에서 노동과 자본은 각각의 한계생산물에 따라 보상받는 독립적인 생산 요소다. 이윤이 착취의 산물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자본의 생산 기여를 이론적으로 소거한 뒤에야 성립하는 논증이며, 그 소거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또한 마르크스 경제학은 소비자 행동에 대한 분석이 극도로 빈약하다. 마르크스의 체계에서 소비는 생산 관계의 종속 변수이며, 소비자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경제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라기보다 계급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수동적 존재에 가깝다. 반면 모딜리아니의 생애주기가설은 개인이 평생 소득 경로를 예측하며 현재 소비를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설은 단순히 이론적 명제에 그치지 않고, 저축률, 연금 제도의 효과, 재정 정책의 장기적 파급력을 분석하는 데 실질적인 설명력을 갖는다. 소비자가 합리적 기대를 바탕으로 미래를 고려하며 행동한다는 이 통찰은 소비를 계급적 위치의 반영으로만 보는 마르크스적 시각이 얼마나 경제 현실을 협소하게 바라보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포스트케인지언의 관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바라보면 또 다른 차원의 비판이 가능하다. 포스트케인지언들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과 계급 권력을 진지하게 다루지만, 그 분석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칼레츠키 전통의 포스트케인지언들은 독점적 가격 결정, 실효 수요의 부족, 금융 불안정성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며, 이를 위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라는 형이상학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는다. 민스키의 금융 불안정성 가설은 2008년 금융위기를 사전적으로 예측한 이론적 틀로 평가받는데, 이것은 가치론이 아니라 대차대조표, 유동성, 부채 구조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서 나온 것이다. 포스트케인지언은 마르크스가 옳게 포착한 문제들. 즉 불평등, 위기, 권력 관계를 더 정교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포스트케인지언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안이자, 그것을 대체하는 더 나은 비판적 경제학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단순한 경제 이론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포괄하는 총체적 분석 틀이라고 반박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총체성이 오히려 문제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이론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반증될 수 없는 이론이 되기 쉽다. 현대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은 반증 가능한 명제와 엄밀한 모형이다. 새뮤얼슨이 수리경제학의 토대를 쌓으면서 보여준 것처럼, 경제학의 발전은 검증 가능한 이론의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그 기준에서 볼 때 하나의 철학적 역사관에 가깝지, 실증적으로 정련된 경제 이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더 정교하고 실증적인 도구로 현실을 분석할 수 있다. 네오케인지언은 수리적 엄밀성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제공하며, 포스트케인지언은 권력과 불안정성이라는 마르크스적 문제의식을 현대적 분석 언어로 재구성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반대한다는 것은 불평등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도구가 있는데 굳이 낡은 틀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