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뜨거운 균열 중 하나는 단연 젠더갈등이다. 이것을 단순히 "남녀 싸움"으로 환원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학문적 언어로만 포장하면 본질이 흐려진다. 핵심은 이렇다. 지금 한국에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자기 정당화의 근거로 삼으며 공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생 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은 다름 아닌 일부 정치권이다.
먼저 구조적 맥락을 짚을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가부장제적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었고, 여성은 그 구조 안에서 제도적·문화적 차별을 실질적으로 경험해왔다. 유리천장, 경력단절, 성범죄 처벌의 관대함,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력 등은 수치로도, 개인의 경험으로도 확인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5년을 전후하여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 페미니즘 운동은 그 자체로 정당한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억눌렸던 것들이 언어를 얻고 광장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흐름의 일부가 래디컬 페미니즘의 형태로 진화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는 미러링이라는 전략을 내세우며 여성혐오적 표현을 그대로 남성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논리는 단순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 이 전략은 혐오의 가시성을 높이고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측면에서 일정한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미러링은 혐오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혐오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었고,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명제가 일부에서 기정사실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는 논리는 그것이 어떤 집단을 향하든 간에, 차별의 언어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성장한 것이 이른바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반페미니즘 담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일부 주장에 대한 비판과,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 담론 지형에서 이 둘은 자주 뒤섞인다. 여경의 체력 기준을 문제 삼는 논의는 공공 안전이라는 실질적 정책 논쟁으로 다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여자는 원래 약하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나 여성 비하와 결합된다. 여성징병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병역 의무의 형평성이라는 문제 제기 자체는 사회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담론이 실제 담론장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상당 부분이 여성의 권리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한 수사적 도구로 기능한다. "군대도 안 가면서 페미니즘 타령이냐"는 식의 논리는 여성의 사회적 발언권 자체를 조건부로 만들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 두 흐름은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적대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먹여 살린다.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극단적 발언은 반페미니즘 진영에 "봐라. 페미니즘은 결국 남성혐오다"라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한다. 반대로, 여경 비하나 여성징병 담론의 혐오적 표현은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에 "봐라. 한국 남성들은 여전히 여성을 혐오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한다. 서로가 서로의 극단을 보며 자신의 극단을 정당화하는 이 구조는 양쪽 모두 이 구조에서 이탈할 유인이 거의 없는 일종의 균형 상태로 고착되어 있다. 게임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혐오의 에스컬레이션이 일종의 내쉬 균형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외부 행위자가 바로 정치권이다. 2022년 대선을 전후하여 젠더 이슈는 명시적인 선거 전략의 핵심 변수가 되었다. 일부 정치인은 "페미니즘이 문제다"라는 메시지로 이대남(20대 남성)의 표심을 공략했고, 반대편에서는 여성 유권자를 결집시키기 위해 혐오의 피해를 부각하는 방식을 취했다. 어느 쪽도 갈등의 해소를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았다. 갈등이 해소되면 동원할 수 있는 유권자 집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구조적 유인이다. 분열이 지속될수록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자들이 존재하는 한, 그 분열은 의도적으로 관리되고 때로는 심화된다. 이 지점에서 정치권은 갈등의 중재자가 아니라 공모자로 기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양비론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를 동등하게 놓는 것이 구조적으로 더 오래되고 제도적으로 더 깊이 내재화된 여성 차별의 현실을 희석시키는 데 악용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비대칭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특정 방향의 혐오를 용인하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구조적 차별에 맞서는 것과, 그 과정에서 특정 집단 전체를 혐오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이 도덕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저항이 또 다른 혐오의 언어를 재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적 기준이 필요하다.
결국 이 순환을 끊는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양보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쪽이 먼저 멈추지 않으면 이 순환은 계속된다는 것도 냉정한 현실이다. 혐오는 혐오로 반박되지 않는다. 극단은 극단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최악을 내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한, 이 게임에는 승자가 없다. 양쪽 모두 상대 진영의 극단적 목소리를 전체의 목소리인 것처럼 다루는 것을 멈추는 것. 그리고 자기 진영 내부의 혐오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으로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한국 사회가 젠더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2020년대를 보내는 동안, 그 실질적 비용은 추상적인 "사회 분열" 이상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저출생 문제는 단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이성 간 신뢰의 붕괴와도 무관하지 않다. 직장 내 성별 갈등은 조직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혐오의 언어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세대는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간에 상처를 안고 성장한다.
혐오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것은 나이브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구조의 비용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계산에서 출발하는 현실주의적 요청이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분석하는 눈이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눈은 어느 한쪽의 편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를 향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