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사람이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에피스토크라시 비판

by Edward Alistair Langford

"법조인이 되려면 로스쿨에 가야하며 의사가 되려면 의사시험을 통과해야하듯 선거를 하려면 선거시험을 통해 자격을 인증받아야한다"


위와 같은 주장이 있다. 위 주장은 에피스토크라시라는 이념을 가진 이들이 종종 주장하곤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에피스토크라시가 가진 직관적인 호소력과 그들의 주장이 가진 함의에 대해 무시할 수가 없다. 무지한 대중이 선동에 넘어가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결정하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브레넌의 논거는 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배심원이 편견에 사로잡혀 판결을 내리면 안 되듯, 무지한 유권자가 국가의 법률을 결정하는 것도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것. 운전하려면 면허가 필요하듯 투표하려면 최소한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이 논리의 매력 자체가 에피스토크라시의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에피스토크라시의 핵심 전제는 정치적 문제에 올바른 답이 존재하며, 그 답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구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성립하는가?


생각해 보면 현대의 정치적 결정의 대부분은 기술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충돌이다. 성장과 분배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안전과 자유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가, 현세대의 이익과 미래세대의 이익 사이에서 어디를 택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는 전문가가 계산해 낼 수 있는 정답이 없다. 경제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놓는 것. 역학자들이 팬데믹 대응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그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가치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브레넌의 호빗-훌리건-벌컨 분류에서 이상적 유권자인 '벌컨'은 "증거가 나타나면 기꺼이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된" 이성적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브레넌이 말하는 벌컨이 지향하는 '객관적 진리'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어떤 경제학 이론이 맞는지, 어떤 안보 정책이 합리적인지, 어떤 복지 철학이 옳은지.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정치 문제를 기술 문제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특정 이념을 중립적 전문 지식으로 위장하는 것을 허용한 셈이 된다. 이러면 오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들 말하지만, 그 오류 역시 각자의 기준에 따라 갈린다.


그렇다면 지식을 기준으로 유권자를 선별하는 시험을 만든다고 해보자. 그러면 대체 누가 그 시험 문제를 내는가?


이 질문에 대해 미국의 역사가 이미 답을 보여줬다. 1855년 코네티컷주가 도입한 문해력 테스트는 '무지한 유권자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리고 이 시험의 실제 목적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후 재건기 미국 남부에서 이 제도는 흑인 참정권을 박탈하는 도구로 전환됐다. 백인 관리들은 흑인 신청자에게 헌법 조항을 암기하고 해석하게 하는 불가능한 수준의 시험을 부과하면서 문맹인 백인들에게는 '할아버지 조항'을 적용해 시험 없이 투표권을 줬다. 결국 1965년 투표권 법이 제정되어 이 모든 지식 기반 테스트가 전면 금지되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걸렸다.


이렇게 말하면 에피스토크라시 지지자들은 이 역사적 사례에 대해 "그것은 제도를 악용한 것이지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악용을 구조적으로 차단할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대체 지식 기준을 설정하는 권한을 가진 집단이 그 권한을 사익으로 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역사는 그 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다. 게다가 이것은 제도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며 권력은 자신의 재생산을 추구한다.


여기서 에피스토크라시 지지자들이 내놓는 두 번째 반론이 있다. 극단적인 선거권 박탈이 아니라 복수 투표제나 에피스토크라시적 거부 위원회처럼 온건한 형태라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도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가중 투표권을 주자고 제안하지 않았냐는 것.


그런데 이 온건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가중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미 이념적 선택이 결정된다. 경제학 전공자에게 가중 투표권을 준다면 규제에 더 비판적인 성향이 강화될 것이고, 사회복지학 전공자에게 준다면 반대 방향으로 기울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전문 지식'이라는 범주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다. 또한 어떤 지식을 정치적으로 관련 있는 지식으로 인정하느냐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 결정이다.


둘째. 헬렌 랜드모어의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 논거가 여기서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있다. 에피스토크라시가 유권자를 걸러내는 행위는 단순히 무지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다양성을 인위적으로 훼손하는 것에 가깝다. 특정 유형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정치에 참여할수록, 그 집단이 공유하는 맹점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동 현장의 가혹함을 모르는 경제학자들, 차별의 미묘한 기제를 경험해 본 적 없는 법률 전문가들이 그 현실을 제도 설계에 반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배우는 지식에는 교과서에 담긴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얻는 경험적 지식도 있다.


이제 여기서 제도보전주의적 관점에서 에피스토크라시를 가장 근본적으로 반박할 논거가 나온다.


제도보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축 중 하나인 필립 페팃의 비지배 자유 개념에 따르면, 자유란 단순히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이 자의적으로 나에게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 자체가 구조적으로 차단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의 핵심은 지배자가 실제로 나쁜 결정을 내리느냐가 아니라,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 없느냐다. 선량한 독재자도 독재자인 것처럼, 유능한 에피스토크라시도 그것이 지배 구조인 한 결코 비지배적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


또한 에피스토크라시가 설령 단기적으로 더 나은 정책 결과를 낸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동의 없이 행사되는 권력이다. 역량이 있다는 것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할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보다 의학 지식이 많다고 해서 환자의 동의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처럼, 지식인이 대중보다 정치 지식이 많다고 해서 대중의 동의 없이 그들의 삶을 결정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 에피스토크라시 지지자들은 "그러나 무지한 유권자의 선택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가"라고 반박할 것이다. 맞다. 그 우려는 타당하다. 그런데 그 해악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참정권을 제한하는 길밖에 없는가? 정치 교육을 강화하고, 숙의 민주주의 제도를 보완하고, 미디어 리터러시를 높이는 것은 배제가 아닌 통합의 방향이다. 그렇기에 만약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배제를 선택할 때, 그 배제는 처음에는 무지한 자를 겨냥하지만 결국 점차 불편한 자를 겨냥하게 될 것이다.


에피스토크라시가 상정하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지식인이 공익을 위해 헌신한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전문가 집단은 무지한 대중보다 공익에 더 헌신적인가?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은 경제학 박사들로 가득 찬 금융 기관들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설계한 것은 지정학 전문가들이었다. 가습기 살균제를 안전하다고 검증해 준 것은 전문가들이었다. 현대의 전문적인 지식은 객관적 판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특정 종류의 실수를 더 정교하게 만들 뿐이다.


로버트 달이 오래전에 지적했듯, 에피스토크라시의 실패는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실무적 차원에 있다. 누가 가장 지혜로운 자인지를 판별할 객관적 기준이 없으며, 권력을 쥔 현자들이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에피스토크라시는 현자들의 통치가 아니라 자신을 현자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의 통치가 된다.


그래서 에피스토크라시와 민주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더 좋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적어도 나쁜 결정을 내린 권력을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체 가능성이야말로 자의적 지배에 대한 구조적 방어막이지 않겠는가.


지식은 권력이다. 그 권력이 공정해지려면 만인의 동의 위에서만 행사되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비지배적 자유의 최소 조건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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