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상추 키우기 팁은 없음 주의
생명에 목적이 있을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사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한 번 살다가는 인생, 목적을 알고 이루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상추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도 식물을 잘 기를 수 있다는 증명? 상추와 적겨자 중 누가누가 잘 크나 경쟁? 아냐. 상추 너의 목적은 멋지게 커서, 맛있게 구워진 삼겹살을 잘 감싼 후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1주차) 씨앗을 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3-4일을 기다리니 싹이 나왔다. 혹시 몰라 씨앗을 왕창 심었는데, 마치 그 모든 씨앗이 발아한 듯했다.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손을 드는 아이처럼, 조그만 떡잎들이 참으로 귀여웠다.
(2주차) 생각보다 상추는 잘 자랐다. 아니, 너무 잘 자랐다. 다만, 키는 계속 크는데 잎사귀가 도통 더 생겨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금 이 아이들은 '웃자람'을 겪는 중이다. 햇빛이 모자라거나, 영양분이 모자라서, 서로 경쟁하듯 키만 크고 있는 것이다. 웃자람을 해결하기 위해선 식물 간 간격을 넓혀주고, 잎사귀까지 흙이 높게 차도록 다시 심어주어야 한다.
(3주차) 웃자람의 고통을 겪은 후, 드디어 떡잎이 아닌 새로운 잎사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두 개로 갈라진 잎 사이에서 파릇한 새 잎이 돋아난다. 정말 신기하다. 너 이렇게 자라는구나.
(4주차) 성장이 더디다. 웃자람만 해결하면 쑥쑥 클 줄 알았는데, 새로 올라온 잎들도 키만 크고 통통해지지 않는다. 이미 잎이 여러 개 나와버려서 저번처럼 흙을 높게 쌓아줄 수도 없다. 햇빛이 부족한 걸까? 조심스레 밖에다 옮겨놓았다. 그랬더니 오히려 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애들아!
(5주차) 밖에 내놓기엔 너무 여린 잎들이라, 조명을 쐬어주는 방법으로 변경했다. 조금씩, 더디지만 크고 있다. 뭔가 영양분을 더 줄 방법이 없을까 찾다가 쌀뜨물이 좋다길래 뿌려주었다. 물을 흠뻑 주니 아직 피지 못했던 씨앗들이 또 발아한다. 너희 살아있었구나!
(6주차) 갑자기 흙 위에 하얗고 보슬보슬한 솜털이 생겼다. 곰팡이다. 물을 많이 준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곰팡이지? 혹시 쌀뜨물을 과하게 준 건가? 그래, 쌀뜨물을 주지 말았어야 했어. 인과관계가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내가 했던 행동들을 후회해본다. 흙 윗부분을 살살 퍼내어 곰팡이를 모두 제거했다. 미안하다, 제발 잘 자라주렴.
(7주차) 느리지만 조금씩 다시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곰팡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번에 눈에 보이던 곰팡이를 다 없앴는데도 다시 생긴 걸 보면, 흙 속에도 곰팡이가 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분 벽면을 따라 조심스레 흙을 들어보니 하얀 곰팡이가 덕지덕지.
그렇게 상추&적겨자 친구들과 작별을 고했다. 웃자랄 때 옮겨 심었던 것처럼, 아이들을 옮겨놓고 흙을 새로 사 넣어 다시 심어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잎사귀들은 힘이 없었고, 이제 그만 날 보내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상추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자기가 원했던 목적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왔다 간 삶이라니, 그것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글을 쓴다. 너에게 목적을 부여한 것도 나니까, 죽어서도 너를 의미있게 기억할 사람도 나여야겠지.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난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어. 그것만큼은 기억할게.
나도 언젠가 죽은 후 누군가에게 의미있게 기억될까? 비록 내가 이룬 것이 하나도 없더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를 보며 행복했노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집에서 상추 키우다가 별 생각을 다 한다.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당분간 식물은 새로 키우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