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부르지 않는 사회
63빌딩 1층 기프트샵에서 ‘스트레스 아웃 토이즈’라는 걸 산 적이 있다. 옛날 만득이 인형이랑 비슷한 건데, 말랑말랑~하니 만지고 있으면 괜히 힐링되는 아주 작은 인형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귀여운 물체의 이름이 ‘스트레스 아웃 토이즈’라니. 이 귀여운 물건 덕분에 내 스트레스가 일부 해소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이름’이 누군가의 스트레스를 없애주기 위한 물건임을 증명하는 뜻이라는 게 조금 슬펐다. 내 생각엔 이름을 ‘말랑뽀짝’ 정도라도 지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말랑하니 귀여우니까.
이름은 대단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이 쓴 것처럼,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지만,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이다. 부모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한다.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는지 그 이름에 모두 담기 위해서 말이다. 기업들도 신제품을 내놓을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이 제품의 이름이다. 이름은 그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첫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류 최초(?)의 노동은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창세기라는 책에서 신은 최초의 인류 아담을 만들고, 그에게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어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아담이 그 동물들에게 이름을 어떻게 지어 주는지 지켜보았다. 아담이 부르는 이름이 그 생물의 이름이 되었다. 아마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창조는 본래 신의 영역이지만, 이름을 짓는 일을 통해 인간은 그 창조 역사에 살짝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창의성은 수많은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선물로 받은 능력이다.
그렇게 중요한 ‘이름’인데, 우리 사회는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 아빠, 엄마, 여보, 형, 누나, 언니, 오빠. 김 대리, 정 과장, 이 부장. 선생님, 교수님, 학생. 아저씨, 아줌마 등등. 새로운 관계가 생기면 호칭부터 정한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는 대부분의 경우는, 친구사이이거나, 동생이거나, 아랫사람을 부르려는데 적당한 호칭이 없을 때뿐인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그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남편을 줄곧 ‘오빠’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남편에게도 엄연히 이름이 있는데, 계속 오빠라고 불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하) 그리고 나로서는 세상 유일한 남편을 수많은 오빠들과 같이 오빠로 부르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고 애칭을 정하자니, 오그라드는 것 밖에 생각나지 않아 정하기가 어려웠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그래도 ‘길동아’는 영 어색해서, ‘길동길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피카츄를 피카피카라고 부르는 느낌이긴 하지만 꽤나 마음에 든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 앞에서 그렇게 불렀다가는 우리 아빠 엄마한테 내가 먼저 혼날 것 같았다. 시부모님은 물론이고. 사회적 관습을 깬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
그래도 난 오늘도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대는 나의 남편이기 전에, 부모님의 아들이기 전에, 누군가의 친구이기 전에, 그대 그 자체니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